[고향 학교에 마을도서관을]원주시 황둔마을 황둔초교

  • 입력 2007년 10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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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시 황둔초교 학교마을도서관은 농촌에 터를 잡은 다양한 사람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다. 귀농인 최선태 씨와 중국 옌볜에서 시집온 김정 씨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다. 원주=전승훈  기자
강원 원주시 황둔초교 학교마을도서관은 농촌에 터를 잡은 다양한 사람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다. 귀농인 최선태 씨와 중국 옌볜에서 시집온 김정 씨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있다. 원주=전승훈 기자
《“연아, 하늘에 보이는 저 별 중에는 지금 없는 것도 있다.” “아빠, 왜 없어요?”

“음, 산에서 ‘야호’하고 외치면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메아리가 들리지? 거리가 아주 멀면 별빛이 지구에 도 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 수 있어. 총을 쏘고 총을 없애도 총알은 계속 날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구름도 쉬어 가는 강원 원주시 황둔마을의 황둔초등학교에 자리 잡은 학교마을도서관. 더덕 농사를 짓는 최선태(53) 씨와 1학년생인 딸 연(8) 양이 과학책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 씨는 “더덕 농사도 가을이 수확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면서도 “여름방학 때는 매일 밤 도서관을 찾았는데 요즘엔 책을 빌려 집에서 밤늦게까지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 더덕 농사 짓는 아버지와 딸의 별똥별 대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살던 최 씨가 황둔마을에 정착한 것은 1994년. 그는 치악산 기슭에 집을 짓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집에서 10년을 살았다. 총각이던 그는 가끔 서울로 가 맞선을 보았지만 여자들은 산골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돌아서기 일쑤였다. 결국 마흔다섯 살에 결혼한 그는 현재 네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는 “산 속에서 혼자 살 때도 발전기 한 대를 돌려 겨우 방 하나에 전깃불을 켜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며 “원주 시내에 나갈 적마다 책방에 들러 책을 사느라 1년에 50만∼60만 원이 책값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작년 11월에 개관한 학교마을도서관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과 네이버가 책 3000여 권을 기증해 학교 중앙현관 로비를 개조한 도서관이 생겼다.

최 씨는 책을 읽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갈 때면 깜깜한 시골길에서 아이와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몇 년 전에 별똥별이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소식에 식구들끼리 마당에 이불 깔고 누워 우주 쇼를 구경했다”며 “책과 자연을 통해 아이들에게 넓은 우주와 자연을 가르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 다양한 새 식구가 하나 되는 도서관

최 씨는 “요즘 농촌의 모습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며 “1학년 학생 가정의 절반 이상은 서울 등지에서 내려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도서관을 찾는 주민은 다양하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토박이 노인뿐 아니라 젊은 사람 중에는 토종된장, 발효식품, 더덕 등을 키우는 도시 귀농인,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시집 온 며느리, 펜션을 운영하는 은퇴자도 많다. 고급 승용차를 끌고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농기계 구입 빚에 몰려 도회지로 엄마나 아빠가 떠난 결손가정 어린이도 많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원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학교마을도서관이다.

1996년 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시집 온 김정(35) 씨. 배추, 무 농사를 짓는 남편을 돕는 그는 “일 잘하는 며느리”로 소문이 자자하다. 옌볜(延邊)의 조선족 학교를 나온 그는 한국 사회를 더 잘 알고 적응하기 위해 날마다 도서관을 찾는다. 그가 자주 읽는 책은 ‘토지’ ‘소서노’ ‘상도’ ‘동의보감’ 등 역사소설류다.

“학창시절 북한은 잘 알아도 남한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 한두 줄밖에 다루지 않아 전혀 몰랐어요. 같은 말이라도 옌볜과 여기는 뜻이 달라요. 드라마 ‘주몽’을 보면서 ‘소서노’를 읽었고 한비야 씨가 쓴 ‘중국 견문록’을 읽고 한국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게 됐어요.”

그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훈춘(琿春), 룽징(龍井) 같은 제가 살던 고향 마을 이야기가 나오니까 정말 신기했다”며 “제 할아버지가 거기서 태어나고 컸는데 우리 땅덩어리가 어쩌다 이렇게 좁아졌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더덕 농사꾼’ 최 씨는 “농민들이 정부가 저리 융자를 해 준다고 하니까 농기구들을 마구잡이로 샀다가 빚더미에 몰려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많다”며 “도시에서 귀농한 사람들도 환경에 어울리지도 않는 집을 짓다가 결국 적응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농민들도 책을 읽고 경영 기법을 배워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며 “학교마을도서관은 새로운 농촌 식구들이 정보를 나누는 문화사랑방이 돼 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원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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