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페서의 계절]<2>브레이크 없는 정계진출

  • 입력 2007년 3월 15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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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황중환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황중환 기자
“교수직은 보험”… 정치판에 부담없이 베팅

한 지방대의 A 교수는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에는 수강 신청자가 많은 교수로 유명하다. 서울에 상주하다시피 하느라 결강이 잦고 시험 대신 보고서만으로 학점을 주기 일쑤다. 학생들에게서 강의 평가를 잘 받기 위해 학점을 후하게 줘서 ‘인기’도 있다.

A 교수는 이번 학기에도 모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느라 벌써 두 차례나 결강을 했다. 일부 학생이 “수업에 성의가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학교 측은 “강의 평가가 좋은 교수”라며 못 들은 체했다.

선거철이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폴리페서는 정치권에서 활동하더라도 대학으로 돌아가면 자리가 보전되는 ‘안전판’을 갖고 있다. 이들이 실직 걱정을 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이유다.

▽“캠프 참여 밑져야 본전”=폴리페서들은 선거철만 되면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들이 선거 캠프에 참여하거나 선거에 출마하느라 수업과 연구를 뒷전으로 미루더라도 대학이 이를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부산대 정진농(영문학) 교수는 “휴직하지 않고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 슬그머니 학교로 돌아오는 교수도 있다”며 “이들은 선거 전 결강을 하더라도 학생들에게 보충강의도 하지 않고 대충 학점을 주곤 한다”고 말했다.

폴리페서들은 지지한 대선 후보가 낙선해도 자신은 교수 직을 유지할 수 있어 손해 볼 일이 없고 지지 후보가 당선되면 요직을 차지하거나 위세를 업고 대학에 돌아올 수 있다.

서울 K대 인문대의 한 교수는 “국민의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던 한 교수는 복직하자마자 주요 보직을 맡았다”며 “동료 교수들이 ‘밖에서 한자리하니까 교내 입지까지 탄탄해졌다’고 수군거렸지만 더 당당하게 행동해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그 교수는 2002년 대선 때도 모 후보 캠프를 쫓아다니느라 강의계획서를 조교가 작성했다”고 덧붙였다.

▽폴리페서 양산하는 법=현행 교육공무원법은 교육공무원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 임기 동안 자동 휴직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1996년에는 교육공무원 이외의 공무원으로 임용돼도 임명권자가 휴직을 명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 법은 복직을 보장하는 길을 터놓은 것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특혜라고 할 수도 있다.

1980년대에는 군부 정권에서 장관 등을 지낸 교수가 복직하려고 해도 학생들이 ‘어용 교수’라고 비판하며 시위를 해서 복직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정부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무조건 복직을 가로막을 수는 없지만 교수들이 임기가 끝나자마자 자동 복직하는 규정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 사립대 B 교수는 청와대와 정부의 고위직을 맡아 2차례나 휴직했다. 이 교수의 강의는 시간강사가 맡거나 동료 교수가 대신해야 했다. 대학은 B 교수가 휴직했기 때문에 새로 교수를 임용하기도 힘들다. 신진 학자들이 취업 기회를 얻을 수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교육이 부실해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한 사립대 C 교수는 정부 위원회 자문위원을 3, 4개씩 맡으면서도 “어차피 곧 복직할 텐데 휴직하면 번거롭다”며 휴직서를 내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교수의 정계 및 공직 진출을 제한하는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좌절됐다.

2004년 여야 의원 13명이 교수가 외부 직책을 맡으면 일단 휴직한 뒤 재임용 절차를 밟도록 하는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같은 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도 정부에 관련 규정 개정을 요청하는 결의문을 내려다 포기했다.

교수 출신 국회의원들은 14∼16대에는 10명도 되지 않았으나 17대 때는 26명으로 급증하는 등 갈수록 교수의 정계 진출이 늘고 있다.

▽현실 참여 순기능도=교수의 현실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교수 출신인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은 “교수가 국회나 정계에 진출하면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면서 “안목을 넓히고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강단에 서면 생생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대학 관계자는 “교수의 정치 참여는 사회 기여의 일부분”이라며 “실무 경험이 많은 교수를 굳이 배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 관계자는 “대학들도 정부와 국회에 ‘민원’을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자기 대학 교수가 정관계에 진출해 있으면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게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장기 휴직하면 재임용 거쳐야=교수의 외부 활동이 직무에 지장을 준다면 휴직 또는 사퇴한 뒤 학교에 복귀할 때 재임용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중앙대 제성호(법학) 교수는 “정계에 진출한 교수가 너무 자주, 장기간 휴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정관계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되 돌아올 때 학교 측에서 의정활동 과정이나 도덕성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등을 검증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논문 표절 시비 등을 계기로 각 대학들이 강화하려고 하는 연구윤리 규정에 교수의 외부 활동 문제도 포함시켜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교수는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대 전상인(사회학) 교수는 “양반 문화의 유산으로 정학일체(政學一體) 개념이 남아 교수들의 정계 진출 비율이 높다”면서 “신념도 없이 선거 때마다 정당, 인물, 후보를 바꿔 가며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교수들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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