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보기는 ‘먹통’… 스프링클러도 없어

  • 입력 2007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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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삼켜버린 참사현장전남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현장. 11일 화재로 보호시설 내의 집기가 모두 타 재가 됐지만 쇠창살문은 굳게 닫혀 있다. 여수=연합뉴스
‘희망’ 삼켜버린 참사현장
전남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현장. 11일 화재로 보호시설 내의 집기가 모두 타 재가 됐지만 쇠창살문은 굳게 닫혀 있다. 여수=연합뉴스
“우리는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남 여수시 화장동 법무부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305호에 수용돼 있던 중국인 자오셴잉(33) 씨는 병상에서 화재 당시의 상황을 적은 쪽지를 본보 기자에게 전했다.

중국어로 쓴 쪽지에는 “한순간에 나의 안전과 생명이 위협을 받았다. 불이 났을 때 쇠창살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외국인 노동자 9명이 숨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는 허술한 소방시설과 초기 진화작업 실패 등이 빚은 ‘인재(人災)’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참사를 통해 지금까지 외국인 보호시설이 불법 체류 외국인의 도피 방지에만 신경을 썼을 뿐 화재와 같은 대형 사고에 대한 대비책은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급박했던 상황=처음 불이 난 304호에 수용돼 있던 중국인 쉬레이(31) 씨는 “잠이 오지 않아 침실에 누워있는데 거실에서 TV를 보던 조선족 중국인 A(39·방화범으로 추정) 씨가 갑자기 ‘불이야’ 하고 소리치며 일어났다”며 “수용자들이 쇠창살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고 외쳤으나 근무하던 직원은 쇠창살 밖에서 소화기를 두세 번 뿌리다 가버렸다”고 말했다.

쉬 씨는 “연기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자 수용자 8명은 유독가스를 피해 화장실로 몰려갔고 물을 묻힌 옷가지로 입과 코를 막고 버텼다”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날 화재 현장에 처음 도착한 여수소방서 조양현(소방위) 부대장은 “304호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쪽 화장실에 사망자와 생존자가 뒤섞여 있었다”고 말했다.

입구와 가까운 301호 수용자들은 감시실에서 근무 중이던 K 경비용역업체 직원 박모(41) 씨가 쇠창살문을 열어줘 긴급히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2∼306호 수용자들은 불이 나고 1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소방관들에 의해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인명 피해 왜 커졌나=시설 내부 바닥에 보온용으로 깐 우레탄 소재의 장판이 큰 인명 피해를 불러왔다. 우레탄은 불이 쉽게 붙는 데다 유독가스가 많이 발생한다.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는 2005년 1월 건물을 신축하면서 난방이 되지 않는 거실에 우레탄 소재 장판을 깔았다. 또 화재경보기는 수동으로 작동했는데도 울리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는 아예 설치돼 있지 않았다.

특히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2층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당직자가 3층 보호실로 올라갔지만, 정작 쇠창살문 열쇠를 가져오지 않는 등 허둥대다 인명피해를 키웠다.

▽방화 가능성에 무게=불이 날 당시 304호실에는 중국 동포 A 씨만 거실에 있었다. 나머지 수용자 7명은 거실 안쪽 침실에서 있었다.

A 씨는 불이 나기 5시간 전인 10일 오후 11시경부터 두 차례에 걸쳐 쇠창살을 타고 올라가 물을 묻힌 휴지로 감시카메라 화면을 가렸다가 용역업체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이어 그는 11일 오전 3시 51분경 세 번째로 감시카메라 화면을 가렸고 4분 뒤 304호 거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당시 용역업체 직원은 더는 승강이를 하기 싫어 이를 방치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A 씨가 감시카메라를 가린 뒤 불을 낸 것으로 보고 있다.

전남 광양시의 한 건설현장에서 붙잡힌 A 씨는 지난달 9일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에 수용됐다. 그는 수용 이틀 뒤 감시카메라를 휴지로 가렸다가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제압을 당했다.

그는 평소에도 “억울해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으나 수용 뒤 묵비권을 행사해 그의 실제 이름조차 제대로 확인이 돼 있지 않다.

경찰은 A 씨가 이날 화재로 숨지는 바람에 사고 원인을 증언해 줄 목격자를 확보할 수 없다며 정확한 화재 원인은 정밀 감식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여수=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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