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내가 너 같구나

  • 입력 2006년 11월 1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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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친구들에게 모이자는 전화가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완전히 ‘삼식이’(은퇴해 세 끼를 집에서 먹는 남편) 신세거든. 집사람한테 눈치 보이지만 매일 산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로당 갈 나이는 아니잖아.”(전자부품 공장을 운영하다가 2년 전에 그만둔 A 씨)

“지난달에 휴가 내고 대전에 한국시리즈 보러 갔잖아. 내가 삼성 라이온즈 팬카페 고문이거든. 젊은 애들도 많은데 함께 어울리면 50대라는 나이를 잊게 되더라.”(공기업 부장 B 씨)

“동철이(가명) 그 친구 또 안 왔네. 외환위기 때 부장에서 잘리고, 애들 학교 보내야 된다면서 억척같이 운동기구 외판원에 청소용역회사까지 다니더니….”(지난해 말 연구기관 이사를 그만둔 C 씨)

이달 초 서울 신촌의 한 돼지갈비 집. 대구의 한 고교 동창생 5명이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소주잔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6·25전쟁 끄트머리에 태어나 출생 신고를 제대로 못해 주민등록상 나이는 두세 살씩 들쭉날쭉 차이가 나지만 실제 나이는 쉰셋 동갑.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노후 준비’로 옮아갔다. “퇴직 후를 생각해 묻어 둔 돈이 얼마나 되느냐”고 조심스레 서로를 떠보던 동창생들은 ‘얼마짜리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표정이 엇갈렸다.

공기업 부장인 B 씨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 나이에 퇴직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총 쏘는 것(주유원)하고 경비밖에 없더라”며 “집값 올라 수억 원씩 번 사람은 내 앞에서 노후의 노자도 꺼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 부처 공무원인 D 씨는 “그래도 50대라 다행”이라는 논리를 폈다.

“우리 세대야 셋방 옮겨 다니다가도 허리띠를 졸라매면 그럭저럭 집 한 채씩은 가질 수 있었고 그게 또 재산이 됐잖냐. 요즘 애들은 무슨 수로 저축해서 집 장만을 하겠어.”

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앉아 있던 중소기업 이사 E 씨가 “야, 너는 공무원이니까 그런 소리 하지”라고 핀잔을 줬다.

“나는 올해나 넘길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중이신데 한 달에 150만 원씩 부쳐야 되고, 딸애 시집도 보내야 되고, 돈 들어갈 데가 아직 얼마나 많은데…. 중간에 끼여서 우리만큼 억울한 세대가 어디 있겠어.”

E 씨의 푸념에 친구들은 말없이 소주잔만 기울였다.

한국의 50대.

1946∼1957년에 태어난 이들은 현재 한국사회의 정점에 서 있다.

상장기업 대표이사 985명의 평균 연령 56.3세, 1∼3급 고위 공무원단 1305명의 평균 연령 50.3세, 17대 국회의원 299명의 평균 연령 51세(2004년 당선 당시)라는 지표만으로도 50대의 사회적 파워는 확인된다.

그러나 정작 50대 개개인은 흔들린다.

본보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에 의뢰해 지난달 16∼23일 전국의 50대 8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의 50대 정체성’ 설문조사에서도 이 같은 사실은 여실히 드러난다.

‘가정에서 50대 가장의 위치가 어떠냐’는 질문에 69.6%가 ‘과거에는 확고했는데 지금은 흔들리고 있다’고 답했고,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적 사건으로는 단연 ‘외환위기’(45.6%)를 꼽았다.

정점까지 올라왔지만 이제는 내려갈 길만 보인다는 한국의 50대 513만여 명.

2006년 그들의 초상은 어떤 모습인가.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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