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거주 미얀마 난민 “망명보다 생이별이 가슴 시렸어요”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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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만 있으면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헤어진 두 아들과 다시 만나는 데 4년이 걸렸다.

지난해 12월 한국 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미얀마 출신의 브리키 아슈(가명·43) 씨는 4년 전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아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꿈에도 그리던 두 아들이 이달 하순 한국에 올 예정이기 때문.

국내 거주 난민에게 해외의 가족을 데려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는 ‘난민 가족 결합’이 국내에선 공식적으로 처음 성사되는 사례다.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적십자, 법무부, 외교통상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대한적십자사 등 국내외의 여러 기관이 10개월에 걸쳐 극비리에 진행한 ‘가족상봉작전’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18년의 유랑생활과 생이별=미얀마 소수민족 출신인 브리키 씨가 고국을 떠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타국을 떠돈 지는 어느덧 18년이 됐다. 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한 ‘8·8항쟁’이 터졌을 때에 브리키 씨는 25세의 대학생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일로 도피 생활을 하게 됐고, 자신 때문에 아버지와 삼촌이 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삼촌은 사망했고 아버지도 감금됐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작은 목선을 타고 태국으로 밀입국했다.

태국에서 같은 미얀마 출신 불법체류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지만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생계를 유지하기가 막막했다. 미얀마 정부의 소수민족 박해는 더욱 가혹해져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14년 동안 태국에서 간난의 세월을 보낸 그는 2002년 두 아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아내와도 헤어졌다. 올해 11세인 큰아들은 방글라데시 난민촌에, 9세인 둘째 아들은 태국에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겼다.

그해 11월 그는 일본 내 미얀마 소수민족협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향했다. 이듬해 그는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고, 2년여의 심사를 거쳐 지난해 말 간신히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처음에 그는 이슬람 사원에서 식사 준비나 청소를 하면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갔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제조업체에 취직하면서 다소 형편이 나아졌지만 아이들을 데려올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극비리에 진행된 가족상봉 작전=올 1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IOM에서 그의 딱한 사연을 알고 한국 정부에 그를 대신해 ‘가족결합 신청’을 낸 것.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불법 체류자 신분일 때에 태어난 두 아들에겐 출생증명서나 신분증이 없었다. 난민 지위 인정은 물론 입국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번엔 대한적십자사가 발벗고 나섰다. “두 아들이 머물고 있는 나라의 한국대사관에서 입국 보증 공문을 보내오면 국제적십자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주겠다”고 법무부에 알려왔다. 국제적십자는 방글라데시와 태국에 있는 두 아들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해 왔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명했던 법무부는 외교부를 통해 입국 보증 공문을 보내주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유전자 샘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친자 확인 절차를 거쳤다.

10개월여에 걸친 ‘난민 가족 상봉작전’은 까다로운 절차를 모두 마친 상태다. 법무부 관계자는 “두 아들이 입국하면 이들도 난민으로 인정해 함께 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한국이 국제적인 인권 규약을 준수하는 국가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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