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주한]조기유학 떠날 필요없는 교육환경을

  • 입력 2005년 2월 2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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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이 조기에 영어를 습득하고 양질의 교육을 받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판단 기준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해외로 나가고 있다. 조기 유학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경우도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불가피한 일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대학 및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국비유학생으로 늦은 나이에 영국에 갔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그러나 2년여 뒤에는 영국인들처럼 완벽하지는 못하고 한국어 악센트도 남아 있는 영어이긴 했지만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영국사회 적응에 한계를 느끼게 한 것은 언어보다 문화적 이질감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적 사고와 문화에 길들여진 전형적 한국인인 나에게는 영국의 문화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영국에서뿐 아니라 덴마크에 방문연구원으로 파견돼 있을 때도 상당한 문화적 인종적 이질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20여 년간 한국에서 교육받으며 다져 온 확고한 정체성이 있었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거주하던 영국 아파트의 주인 할머니는 자신의 딸이 교사로 있는 사립 중학교에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국 아이가 부모도 없이 홀로 공부하러 와 있다고 했다. 그 학교는 보통 영국인들도 학비가 비싸 보내지 못하는 곳인데 한국 아이가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어떻게 입학을 하긴 했는데 학교생활에 장애가 많아 자기 딸이 집에 데려다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아이 부모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지, 또 그 어린 나이에 왜 혼자 이국땅에 공부하러 왔는지 나에게 묻는데 정말 대답하기 곤란했다.

마구잡이 조기 유학은 어린 학생에게는 물론 한국에 남은 가족에게도 고통이 될 수 있다. 조기 유학의 명암을 주제로 한 교육포럼 장면.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기 유학의 문제점은 바로 자기정체성 문제로 보인다. 어린 시절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할 나이에 외국에서 부모의 사랑과 보호 없이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사는지에 대한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영국 학교에 입학해 혼자 또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한국학생들을 수없이 보았다. 때로는 문화적 인종적인 벽을 극복 못해 탈선하고, 한국역사는 이해하지 못해도 영국왕실 계보는 줄줄 외우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 또 영국 여왕 생일에 축하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도대체 영국 여왕 생일이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보다 자기 정체성을 교육시키는 게 우선이 아닐까. 반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한국에서의 교육이 올바른 성장을 저해하거나 외국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어는 국내에서 내실 있게 교육하고 부족하면 대학시절 어학연수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외국어는 생활하는 데에 하나의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조기 유학은 가족을 해체해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고 외화를 낭비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성공의 보장도 없는 조기 유학을 위해 우리 아이들을 해외로 내모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정부도 왜 이렇게 조기 유학 붐이 일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고 국내에서도 선진국 못지않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주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광기술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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