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하태훈]우리도 법정공방 보고싶다

  • 입력 2004년 12월 19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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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변하고 있다. 개혁의 화두 속에서 선판례와 실무관행을 꺼내 놓고 성찰하고 있다. 형사사건에서는 최초로 대법원에서 공개변론을 열어 양측의 공방을 지켜보더니, 학계의 비판적 문제제기에 뒤늦게나마 응답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공판정에서 재판장이 생생하게 들은 피고인의 목소리보다 검찰청의 수사검사 앞에서 피고인이 힘없이 내뱉은 진술을 기재한 서류가 더 우대받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2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해 온 판례를 파기한 것이다. 이제 ‘피의자가 내 앞에서 이렇게 자백했다’는 검사의 일방적 주장인 피의자 신문조서가 ‘그렇게 자백한 적 없다’는 법정에서의 피의자 주장으로 휴지통에 던져질 신세가 됐다.

▼검찰 자백조서 진실규명 한계▼

지금까지 법원은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피의자가 직접 서명하거나 날인했다면 그 조서에는 피의자의 진술이 그대로 기재된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아무리 피의자였던 피고인이 재판정에서 자신이 그렇게 자백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특별히 수사 과정의 가혹행위 등이 입증되지 않는 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피고인의 공판정에서의 생생한 진술이 아니라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불과한 조서에 의해 재판이 진행된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사실 재판은 검사와 피고인이 법정에 나오지 않아도 검사가 꾸며 제출한 조서만으로 판가름 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의 공판 절차가 이름뿐인 공판심리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공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벌이는 치열한 공방은 머나먼 미국 땅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라면서 영화와 비디오를 통해 전해진 미국의 법정 모습을 부러워했다.

우리의 공판정 모습도 그래야 한다. 법관의 유무죄 심증은 일반인에게 공개된 법정에서 직접 검사와 피고인의 변호인 사이에 벌어지는 공격과 방어를 통해 얻어져야 한다. 검사의 일방적 주장인 공소장이나 피의자 신문조서에 의해 심증이 형성되어선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형사소송의 기본 원칙인 공판중심주의다. 이는 사건 부담이 많고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생략되어서는 안 될 핵심 원칙이다. 재판부는 조서의 죽은 글자에서 진실을 캐내려 들지 말고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생생한 목소리, 얼굴빛과 진술 태도 등을 통해 진실을 가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자백조서가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반대진술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단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면 검사는 자백을 받아 적어 내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법률적 지식도 없고 심리적으로 불안하며 변호인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피의자가 검사실에서 힘없이 내뱉은 자백이 결정적이라면 공판심리는 열어서 무엇 하겠는가. 법정에서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 못한 피고인이 검사가 제출한 조서만으로 진행된 1심 재판의 결과에 과연 승복할 것인가. 그래서 사건이 대법원까지 가는 것이다.

검찰은 피의자의 자백조서가 피의자였던 피고인의 공판정에서의 자백 부인의 진술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피의자의 자백이 강압이나 불법한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조사 과정의 녹음·녹화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자백 중심의 수사관행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며, 공판정에서 피고인 및 그의 변호인과 일전을 벌일 준비보다는 어떻게든 조서를 받아 내 수사에서 끝내겠다는 생각이다.

▼법정서 당당히 맞설수 있어야▼

검찰은 녹음이나 녹화에 힘쓸 것이 아니라 고문과 같은 조사 과정의 불법행위를 예방하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려면 피의자 신문 시에 변호인을 참여시키는 방안을 도입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수사 과정을 자백 획득의 기회가 아니라 공판정에서 피고인의 주장과 방어를 무디게 할 수 있는 증거 수집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교수·형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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