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피해자권리에 ‘발길질’… 사법불신 자초

  • 입력 2004년 7월 27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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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는 잊혀진 존재인가?

형사소송 절차의 민주화로 범죄 피의자의 인권 보호는 많이 개선되고 있으나 범죄 피해자의 권리 보호와 피해 구제는 소홀하다.

수사와 재판 등 형사 절차는 피해자를 배제한 채 가해자와 국가(수사기관 및 법원) 중심으로 진행돼 피해자의 사법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씨 사건 희생자의 어머니가 경찰의 발길질에 넘어진 모습은 이 같은 ‘피해자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피해자는 ‘잊혀진 존재’=20여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한 A씨(50)는 지난해 10월 “인터넷을 통한 건강제품 판매사업을 하면 매달 200만∼3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B씨(42)의 말에 속아 2000만원을 건넸다가 뜯겼다.

A씨는 B씨를 올 2월 사기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으나 이후 B씨가 어떻게 처리됐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진행 상황을 알려줄 수 없다”고 했고 사건기록 열람도 불가능했다. A씨는 지난달 수소문 끝에 사건 처리 결과를 알아봤으나 B씨는 이미 불구속 기소된 뒤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형이 확정돼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A씨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의 범죄 피해자는 ‘잊혀진 존재’다. 고소인과 참고인 또는 증인이 되는 것 외에 형사절차의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수사기관에서는 피해자, 즉 고소인에게 수사 진행 상황을 알려줄 의무가 없으며, 원칙적으로 무혐의 처리할 경우만 고소인에게 통지를 해 준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피해자들은 수사와 공판 진행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불만으로 꼽고 있다”고 말했다.

6월 의붓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수감 중인 남편이 석방된다는 소식에 격분한 딸의 친어머니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재판장에게 보낸 사건도 근본적으로 피해자가 사법 절차에서 소외됐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법조인들은 지적한다.

유엔은 1985년 ‘범죄와 권력남용 피해자에 관한 사법 기본원칙’을 제정해 “피해자는 동정어린 대우를 받아야 하고 그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피해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절반 이상의 주가 피해자의 정보접근권과 형사 절차에서의 진술권 등을 주법에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독일은 1987년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모든 피해자에 대해 기록열람권을 허용하고 있다.

▽‘피해자의 재발견’ 노력=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사개위)도 이 문제를 논의 중이다. 사개위는 제2분과 전문위원 연구반이 27일 제출한 ‘범죄 피해자의 보호 방안’ 보고서를 토대로 피해자 보호에 관한 구체적인 개선안을 조만간 확정해 최종영(崔鍾泳) 대법원장에게 건의할 예정이다.

이 보고서는 피해자들에게 관련 사건의 첫 공판 기일을 통지해 주도록 하는 방안과 심급별 선고 결과, 피의자와 피고인의 구속 석방 등에 관한 정보까지 제공하는 방안 등을 개선책으로 내놓았다.

사개위 관계자는 “형사 사법 절차는 기본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사법 서비스라는 측면이 있다”며 “피해자를 ‘형사 절차의 주체’로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각국의 범죄 피해자에 대한 형사절차 진행사황 통지 비교
나라통지 의무자통지 내용통지 방법
미국·수사초기:경찰·형사절차 개시 후:검사·체포 사실, 판사에게 보낸 사실·양형 심리 기일·범죄자의 보석 석방·범죄자 가석방 심사 및 가석방·상소 제기 여부·지역사회 성범죄자 석방 ·전화로 내용 통지·피해자가 전화할 경우 통지·서면 통지
독일법원·공소 기각·법원에 의한 절차 중단·판결 결과
일본검찰과 경찰·소추 여부·공판 기일·재판의 결과, 상소 제기 여부·구속 및 보석 여부서면 통지
한국검찰, 일부는 경찰·기소 또는 불기소 여부전화 또는 서면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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