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장애' 위기의 40대]내자리는 어디?…소외된 중년

  • 입력 2003년 4월 21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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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부처 2급 공무원인 이모씨(48)는 요즘 ‘헛살았다’는 자괴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27세에 행시에 합격한 뒤 그는 지금껏 거의 매일 오전 7시부터 자정 가까이 일에만 몰두해왔다. 가정을 지키는 ‘든든한 가장’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가끔 가족들이 ‘아빠는 출근 중’이라며 핀잔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가정에서 ‘외면’당하기 시작한 것. 간혹 일찍 퇴근해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아이들은 아빠와의 대화 자체가 어색한 듯 서둘러 방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아이들 또는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아 남편이 새삼스레 끼어들 여지가 없는 듯하다.

이씨는 직장에서도 ‘왕따’가 되고 있다고 느낀다. 충성을 다했던 직장이 이제 그를 ‘단물 빠진 퇴물’ 혹은 ‘월급 도둑’ 취급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40대 중년 남성들이 심각한 ‘관계(關係) 장애’를 호소하고 있다. 관계 장애란 부부 관계, 자녀 관계, 직장 등 사회적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소외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현상. 급격한 세대교체와 기존 권위와 질서의 붕괴, 그리고 사회 가치가 혼돈양상을 보이면서 한국의 중년 남성이 겪기 시작한 일종의 ‘화병(火病)’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단행한 연공서열 파괴의 공직인사, 대통령인사보좌관이 1급 공무원의 운명을 로또복권에 비유해 발언한 것 등은 가뜩이나 심화되고 있는 공직자들의 관계 장애를 ‘가속’하고 있다.

공직사회뿐만 아니다. 관계 장애는 사회 각 분야의 중년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증권회사 부장 김모씨(42)는 아침 시황보고 토론회의 때마다 “저건 아닌데…” 싶어도 입을 꾹 다문다. 경험은 많지만 젊은 직원들이 영어와 인터넷을 무기로 ‘반박’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40대는 가정과 회사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뜬 세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광고회사 부장 권모씨(42)는 회식 때마다 서글프다. 술을 마시며 젊은 후배들에게 옛날 얘기도 들려주고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싶지만, 후배들은 그런 자리를 마뜩찮아 하기 때문이다. 권씨는 “예전에는 선배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요즘은 후배들로부터 술자리를 강요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1월부터 전국 20세 이상 성인 1200명에 대해 ‘행복도’를 설문조사한 결과 40대의 행복감은 1.7점 상승에 그쳐 전 연령층에 걸쳐 상승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임상심리연구소 윤화영 소장은 “대다수 남성들은 정작 자신이 관계 장애를 겪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며 “이 때문에 관계 장애가 더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40대 연령층이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격적인 변화를 꾀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50, 60대 방식의 삶을 이어받기도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강지남기자 layra@donga.com

▼관계장애 해결책은…▼

40대는 소위 ‘사오정’세대로 불린다. 45세가 정년이 된 현실을 비꼬는 의미인 ‘사오정’은 남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속어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심인 40대 한국 남성이 ‘사오정’으로 전락한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할까.

전문가들은 우선 연공서열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변화를 근본원인으로 꼽고 있다. 40대는 20, 30대에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성취를 얻어야 할 나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위축되거나 무기력해진다는 것.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정년이 보장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40대는 퇴직 이후의 삶을 본격적으로 새롭게 설계해야 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김도환(金道煥) 연구원은 “40대에는 구조조정 때문에 실직한 사람에서 벤처로 떼돈을 번 사람까지 사회적인 지위의 격차가 어느 세대보다 크다”며 “비슷한 또래의 동질성이 희미해지면서 불안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생겨도 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도 한 가지 원인이다.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상담을 원하는 40대 남성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자녀문제로 찾아온 부모를 검사하면 10명 중 절반 이상의 아버지가 가족, 사회관계에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계 장애 극복을 위해서는 일단 문제점을 인식하고 생활방식을 차근차근 바꾸어 나가라고 전문가들은 권유했다.

한국가족상담센터 김덕일(金德一) 상담팀장은 “40대 남성들은 아내나 아이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관계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작은 변화부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임상심리연구소 윤화영(尹華英) 소장은 “한꺼번에 변화하려는 욕심은 금물”이라며 “집안에서 자녀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함께 자전거를 타는 등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권했다.

서울불교대학원 김명권(金明權)교수는 “실존적 허무감이나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중년끼리의 모임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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