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한 엄익준차장 몸통인가 희생양인가

  • 입력 2002년 1월 25일 16시 36분


2000년 5월 사망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각종 대형 비리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과 의혹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번에 ‘이용호(李容湖) 게이트’ 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씨의 보물 발굴사업과 관련해 주요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수지 김 살해 사건 은폐와 ‘진승현(陳承鉉) 게이트’ 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건 연루 시기는 모두 99년 말∼2000년 초. 그는 당시 국정원 2차장으로서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정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엄 전 차장은 99년 말 해군이 이형택씨의 보물 발굴사업 현장에서 탐사 작업을 하도록 이수용(李秀勇·현 석유공사 사장) 당시 해군 참모총장에게 지원 요청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국방부에서 국정원에 파견나간 한철용(韓哲鏞·현 육군소장) 국방보좌관은 그의 지시를 이 참모총장에게 전달했다고 시인했다. 이형택씨는 2000년 1월 오승렬(吳承烈·현 해군참모차장) 정보작전참모부장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사업 지원을 요청했다.

검찰 및 전 현직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엄 전 차장은 벤처기업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벤처기업가들이 99년부터 벤처붐을 타는 과정에서 약점이 많이 생겨 정보기관과 권력기관의 영향권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엄 전 차장은 또 2000년 2월 경찰이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히려던 ‘수지 김 살해 사건’ 을 은폐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승일(金承一)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은 검찰에서 “엄 전 차장이 ‘경찰에 사건이 공개되면 곤란하다’ 는 뜻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고 진술했다.

따라서 엄 전 차장은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에 있으면서 최근 잇따라 터진 각종 게이트 및 의혹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고한 엄 전 차장이 ‘희생양’ 이 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는 점을 악용해 엄 전 차장에게 의혹을 덮어씌우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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