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연습 ‘강건너 불’…공무원들 "헷갈려요"

  • 입력 2001년 8월 22일 18시 23분


“22일 오전 4시00분부로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계엄령이 선포됐으니 이에 따른 자동 조치 사항을….”

22일 오전 서울시내 한 구청 을지연습 상황실로 긴박한 상황을 알리는 이같은 내용의 팩스가 들어왔다.

그러나 베이지색 훈련복을 입은 공무원들은 ‘강 건너 불’ 보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한 공무원은 예년보다 앞당겨진 국정감사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벌어지는 현란한 게임에 몰두하며 한 손으로 야식을 챙겨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게 현실감이 나야 긴장하지요. 누구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언제 오려나 목빠지게 기다리면서 일선 공무원들에게는 북한을 가상적으로 삼아 도상 훈련을 하라니 원….”

▼장관 훈련용집무실 안들려▼

20일부터 6일간 일정으로 시작된 전시대비 도상연습은 완전히 김이 빠져 있다. ‘햇볕정책’의 등장과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속되고 있는 ‘대북 유화 정책’의 영향으로 공무원들 사이에 예년 같은 긴장감이 사라졌다. “‘북한 주적’ 개념은 군사적 측면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공무원들은 말한다.

▼對北觀에 상당한 논란▼

정부 부처에서는 매일 오전 장관이 상황실에서 간밤의 상황을 보고받는 평가회의를 주재하지만 공무원들은 자리를 비우기 일쑤다. 한 중앙부처에는 훈련용 장관실과 차관실이 마련돼 있지만 장·차관은 훈련 시작 이후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정부 과천청사의 한 국장급 공무원은 “현장에 침투하는 간첩에 대한 대응 등이 과제인데 요즘 이 개념 자체에 혼란이 와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통일 정국에서 빚어질 일자리 부족 등 혼란상황을 가정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성급한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은 여러 군데에 있는 비상벙커에 들어가면 24시간 비상 대기하며 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대부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직원들은 일찍 귀가시키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을지연습 기간에 공무원들은 평양 ‘8·15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의 실정법 위반 행위 수사와 관련해 대북관(對北觀)에 혼란을 느끼고 있다.

정부중앙청사의 한 국장급 공무원은 “대통령이 앞장서서 김정일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막대한 물적 지원을 해주는 상황에서 검찰이 ‘만경대 방문록 파문’과 ‘개막행사’ 연루자들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댈지 정말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모 서기관은 “검찰과 통일부 사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방북 허가가 난 것에 대해 공무원들 사이에 비판적인 견해가 많다”면서 “대북 유화정책도 좋지만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되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는 ‘을지연습 하면서 애국가로 그린 우리나라 지도’라는 제목의 장난기 어린 글이 떠 “연습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내부 비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을지연습

정부 차원에서 민관군이 합동으로 전시에 비상 행정을 펴는 연습과 ‘작전계획 5027’에 따라 적을 격퇴하는 한미연합지휘소연습(CPX)으로 이뤄져 있다. 민간 공무원들은 특정한 가상 상황이 주어지면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고 물자를 동원하는 등 전쟁을 측면 지원하는 행정을 문서상으로 연습한다.

<이진영·정연욱·김준석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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