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퇴출]회생-청산 두 기업의 엇갈린 희비

  • 입력 2000년 11월 3일 18시 34분


《3일 퇴출대상 명단 발표로 기업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퇴출대상으로 거론되다 회생한 기업의 직원들은 TV 발표를 보며 일제히 환호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일거에 날려보낸 것이다. 반면 가슴을 졸이다 청산 소식을 전해들은 기업은 초상집처럼 변했다. 워크아웃 상태에서 ‘회생’과 ‘퇴출’의 정반대 길을 걷게 된 신호제지와 피어리스의 모습이다.》

▼'회생' 신호제지▼

“오늘 저녁에는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소주 한잔 걸치렵니다. 회사가 살아난 것이나 ‘휴지조각’이 될 뻔했던 우리사주가 상한가를 친 것 모두 축하해야죠.”

신호제지 경리부의 양창길대리(33)는 3일 오후 무척이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양대리는 “퇴출 기업으로 거론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게다가 경기는 침체되고 IMF위기가 다시 온다 아니다 하는 때 아닙니까”라고 덧붙였다.

퇴출 기업 발표에서 회생 결정이 난 신호제지의 서울 서초구 양재동 사무실. 직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쁨을 나눴다. 잔뜩 굳어졌던 간부들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신호제지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것은 98년 11월. 98년말 신문지공장을 외국 기업에 2300억원에 매각하는 등 자구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2차 퇴출 발표를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돼 왔다. 현재 인쇄용지와 산업용지를 생산, 국내 시장의 22%를 차지하는 중견기업.

재경팀 장영기부장은 “상반기 영업 실적이 좋은데다 며칠전부터 은행권에서 ‘심사 결과가 긍정적’이라는 얘기가 새 나왔지만 정작 발표가 나기까지는 1200여명 임직원 모두가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퇴출’의 압력에서 벗어났지만 갈 길은 멀다. 김종훈(金鍾勳)대표이사는 “국민의 돈으로 살아난 기업 아닙니까. 2004년까지 예정된 워크아웃을 앞당겨 졸업하는 것이 최대 목표입니다.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기업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고 노력할 겁니다.”

▼'퇴출' 피어리스▼

같은 시간 ‘퇴출’의 길로 들어선 피어리스의 직원들은 허탈감에 일손을 놓고 말았다. 피어리스 부자재개발팀의 한 남자직원은 “화장품업계 최성수기를 맞아 중고가 신제품을 며칠 안에 선보이게 돼 있는데…” 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그는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이 뭘 알겠느냐” “깜짝쇼도 아니고 뭘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정부의 퇴출 발표를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조중민 사장과 임직원들은 부서별로 마라톤 대책회의를 가지며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었다. 56년 설립된 피어리스는 70년대 국내 화장품업계 3위 안에 들던 중견기업. 외환위기 때 보유 중이던 300억원 상당의 제일은행 주식이 은행 해외매각으로 휴지조각이 된데다 계열사가 부도나면서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워크아웃 결정 뒤로는 1000명이 넘던 직원을 400여명으로 줄이고 지방사옥을 매각하는 등 뼈아픈 구조조정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회생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TV를 지켜보던 피어리스의 한 20대 여직원은 “동료들이 떠난 직장에서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도 모두들 회사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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