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폭등 비상]정부 뒷짐이 위기 키웠다

  • 입력 2000년 9월 13일 18시 55분


유가 폭등으로 나라 살림에 비상이 걸렸다. 유가상승이 계속 이어지면 경제가 마비될 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관리능력이다. 에너지 파동과 같은 큰 현안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풀어 갈 수 밖에 없다.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대책을 세우느라 허둥대는 '뒷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올해초 한때 국제유가가 배럴당 30달러선을 넘어서자 세계은행(IBRD)은 '제3의 오일쇼크' 가능성을 경고했다.민간연구소의 위기보고서도 잇달았다. 정부는 그러나 이 말을 흘려버렸다. 당시 재정경제부 관계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유가는 제풀에 꺾일 것" 이라며 민간의 우려를 '근거없는 위기론'으로 몰아붙였다.

이달초 국제유가가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이에 따라 국내 주가가 폭락할 때도 정부측은 "지켜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 안이한 대응이 화(禍) 불렀다 = 국제원유 가격은 3월초 배럴당 34달러를 돌파, 91년 걸프전 이후 9년만에 처음으로 30달러선을 넘어섰다. 불과 1년 사이에 3배 이상 뛰었다. 특히 국내 도입물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동산 두바이유가 오름세를 주도해 우리 경제가 받은 타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정부는 "미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유가상승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국제유가는 조만간 안정될 것" 이라는 낙관론을 폈다. 유가가 계속 오를 경우 국내 가격에 반영할 방침을 세웠다가 4월 총선을 앞두고 물가에 안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뒤늦게 번복하는 등 대응도 오락가락했다.

유가는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내림세로 돌아서 배럴당 25달러 안팎까지 떨어졌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들은 "정부 예측이 맞지 않았느냐"면서 우쭐해했다.

국제유가 급등이 장기화하면 외환위기 터널을 가까스로 벗어난 우리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받고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고물가)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당장 올해 거시경제 지표의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지지만 정부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못한채 허둥대고 있다.

▽ 무대책이 대책 =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선에서 안정된 지난해초 일부 재계 인사들은 정부 비축유를 늘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기름값이 쌀 때 국제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중 일부를 원유 구입에 써 미래에 대비하자는 것.

정부는 "유가가 오를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 비축물량을 늘리면 보관비용만 더 든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70,80년대 두차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정부는 △중동지역에 편중된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해외 유전개발에 적극 나서며 △에너지 소비절약 시책을 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85년 58%에서 지난해 72%로 오히려 높아졌고 해외유전개발 투자액은 97년 5억8300만달러에서 지난해 2억달러대로 줄었다.

연간 8조∼9조원의 석유수입 부과금을 걷고 있지만 에너지관련 투자에는 인색했다. 에너지 절약 유도를 명분으로 서민들이 많이 쓰는 수송용 유류의 세율을 올리기로 했지만 정작 전체 에너지소비의 60%를 차지하는 산업용 에너지의 소비효율을 높이는 대책에는 신경을 못쓰고 있다.

정부는 에너지를 전량 수입해쓰는 처지인 탓에 고유가 대책에는 한계가 있다 고 항변하지만 그나마 정책다운 정책을 내놓지 못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지적이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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