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그 아름다운 삶]서울 동작구 '가족공동체 살림터'

  • 입력 2000년 5월 7일 20시 57분


가난하지만 그 가난에 절망하지 않는다. 가난은 ‘함께 사는 삶’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소중한 청춘과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월급을 노숙자 가족들에게 쏟아부으면서도 한사코 그것이 ‘봉사’가 아님을 강조하는 이들. ‘돈과 시간을 바친 봉사자’보다 ‘꿈과 희망을 함께 나눈 가족’으로 노숙자들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가족공동체 살림터’(서울 동작구 사당5동)의 젊은이 6명이 바로 그들이다.

46명의 노숙자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이곳 살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족 노숙자’를 위한 쉼터다. 현재 노숙자 쉼터는 서울에만 106곳(3400여명 수용)이 있지만 그 중 ‘가족 노숙자’를 위한 곳은 2곳뿐이다.

이 살림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98년9월. 창단멤버인 남철관 총무(31)와 김은경 간사(31·여)는 당시 서울역 등지의 수천명 노숙자 가운데 텐트를 치고 가족과 함께 사는 ‘가족 노숙자’가 적지 않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가족이 함께 노숙할 정도라면 경제적 수단을 완전히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극한상황에서도 그들은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남총무의 설명이다.

마침 성공회의 한 신부가 이들에게 가족 노숙자들을 위한 살림터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각각 지역운동 등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바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서울시로부터 허가받아 0.7평짜리 작은 방 26개가 마련된 건물을 빌렸다. 중학교 교사였던 김간사의 남편 황상연씨(31)도 교단을 떠나 이 ‘고난의 길’에 흔쾌히 합류했다.

하지만 막상 이들을 모아보니 일이 쉽지 않았다. 가족 노숙자들은 생활 자체를 포기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살림터에서조차 절망감에 사로잡혀 또다시 가출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더이상의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먹이고 재우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움받는 쪽은 능동적으로 살기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누군가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생각에 더 소극적으로 변하는 거지요.”

이때부터 이들은 살림터를 복지시설이라기보다 공동체로 만들 결심을 했다. 1주일에 한번씩 가족회의를 열었다. 살림터 내의 대부분 문제를 이들 가족들과의 토론을 통해 결정해나갔다. 주인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일자리를 알선하는 상담 자리에서도 항상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가정을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강조했다. 밥도 함께 먹고 잠도 함께 잤다.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가족’이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쉽지 않았다. 남총무는 과로로 폐결핵에 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3명이 더 충원돼 6명으로 불어난 젊은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의 열성에 가족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출했던 가족들도 하나둘씩 돌아왔다. 사업 실패로 5000만원의 빚을 지고 살림터에 들어온 박모씨(45)는 아내가 가출에서 돌아오자 공사장 일을 ‘두 탕씩’ 하며 8개월만에 1000만원을 저축했다.

무너졌던 가정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나갔다. 숙소에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희망을 품고’ 살림터를 출소하는 가족도 늘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이들의 모습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젊은이들. 이들은 ‘나눔의 정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는 절대 가난한 사람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며 그 속에서 희망을 키울 뿐이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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