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빌려준 사람이 땅 팔아도 횡령罪 안된다"

  • 입력 2000년 3월 30일 00시 46분


자신의 명의를 숨기고 다른 사람(명의수탁자)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산 사람은 명의수탁자가 이를 몰래 팔아도 횡령 혐의로 처벌을 요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은 부동산실명제법에도 불구하고 신분 은닉이나 투기, 탈세의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내세워 부동산을 거래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송진훈·宋鎭勳대법관)는 29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했다가 처분한 혐의(횡령)로 기소된 박모씨(46)의 상고심에서 이같이 판시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원래의 땅주인이 땅을 사려는 실제 매수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명의수탁자와 계약을 했다면 수탁자는 부동산 등기와 동시에 적법하게 소유권을 취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횡령죄는 ‘남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이를 임의로 처분한 경우에 성립하지만 박씨는 법적으로 땅을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땅주인에 해당하므로 이를 팔아 버려도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항소심 재판부도 “부동산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라는 법의 취지에 따라 피해자인 실제 매수자 보호보다는 명의수탁자를 단죄할 수 있는지에 따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판사들은 땅주인이 명의신탁 사실을 알고 땅을 판 경우라면 횡령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으나 확립된 판례는 없다. 부동산실명제법은 이 경우 명의수탁자가 한 등기를 무효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매수자가 한 번이라도 소유권을 가졌다가 명의를 신탁했다면 명의수탁자는 ‘재물 보관인’이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

대법원은 2월22일 김모씨가 신축한 건물을 명의신탁받아 몰래 판 조모씨 등 2명에게 횡령혐의 유죄를 확정했다. 건물 신축과 동시에 김씨는 등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원시취득’이라는 소유권을 가진 것으로 보기 때문.

한편 박씨와 같은 경우 피해를 본 실제 매수자들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땅 자체를 되돌려 받을 수 없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다만 박씨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제기해 돈을 돌려 받을 수 있으나 이 경우 원금 이외에 오른 땅값이나 이자까지 받을 수 있는지는 대법원 판례에 달려 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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