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 기획/총론]「아홉수 해」사건 조망

  • 입력 1999년 2월 3일 19시 44분


《1999년은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 80주년이 되는 해다. 특히 올해처럼 ‘아홉수’로 끝나는 해에는 유난히도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다. 백범 김구선생이 피살(1949)됐고 조봉암이 처형(1959)됐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3선 개헌(1969) 10·26, 12·12(1979)도 있었다. 문익환 임수경의 방북으로 통일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난 것도 1989년이었다. 국권 상실로 시작돼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막을 내리게 된 우리의 20세기. 그 영욕의 20세기를 딛고 ‘통일 한국’의 21세기를 맞이해야 할 시점. ‘아홉수 해’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시 조망해보고 21세기의 도약을 준비하기 위한 기획 시리즈 ‘임시정부에서 통일정부까지’를 주 1회씩 총10회 연재한다.》

올해로 끝나는 1900년대는 남북을 통튼 우리 겨레에게 비극과 시련이 점철된 통한의 한 세기였다. 우선 1905년에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데 이어 1910년에는 아예 국권을 빼앗겼고 그때로부터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살아야 했다. 1945년에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곧바로 연합국에 의해 남북으로 나뉜 채 3년 동안 각각 미국과 소련의 점령통치를 겪어야 했다. 그 결과 1948년에 남에서는 대한민국이 섰고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섰으며, 이로써 ‘대립적 2개 분단국가 시대’가 열렸다.

▼ 분단―대결구조 비용 너무 비싸 ▼

그것은 이미 한반도판 남북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실제로 1950년에 북한의 남침으로 대규모의 동족상잔이 발생했으며, 1953년에 이르러 겨우 휴전협정으로 일단 마무리됐다. 그러나 상호 불신과 적대감은 완화되지 않은 채 남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깝게 치열한 자기소모적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분단대결구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한 현실로 나타났다. 남은 국제통화기금(IMF) ‘신탁통치’를 겪어야 했고 북은 ‘기아(饑餓) 국가’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의 형편은 빠르게 개선되고 있지만 넘어야 할 고비는 여전히 여러 곳에 잠복해 있고, 북의 형편은 더더욱 불투명하다.

내년부터 시작될 2000년대의 민족적 상황은 1900년대의 그것과 얼마나 달라질까? 우리 겨레의 저력을 믿고 낙관론자들의 전망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러나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평화통일의 꿈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형편에 비춰 평화통일을 말하는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분단 대결구조의 비용이 너무 비싼 현실을 고려할 때, 평화통일을 성취해야 비로소 1900년대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정보화 세계화의 2000년대에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며 인류사의 진운에 능동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다는 명제를 21세기의 역사적 과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 올해는 안중근(安重根)의사 의거 90주년의 해이면서, 2·8 도쿄 독립선언과 3·1독립운동 80주년의 해이고 광주학생항일운동 70주년의 해다. 우리는 그 운동들에서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움으로써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민주 번영 평화의 활기찬 새 세계를 열고자 한 선열들의 함성을 듣는다.

3·1운동은 곧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올해는 바로 임정 수립 80주년의 해가 된다. 동시에 임정의 마지막 주석으로 해방 이후 통일국가 수립에 진력하던 김구(金九)피살 50주년의 해가 된다. 그리고 노선에 대한 찬반의 다른 평가를 받았지만 평화통일을 제창했던 조봉암(曺奉岩) 처형 4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다시 그때로부터 10년 뒤인,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69년은 세계사에 있어서나 전후(戰後) 한반도의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의 해였다. 닉슨 독트린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냉전 시대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인식하고 냉전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취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닉슨 행정부 스스로 옛 소련과 중국에 대해 화해의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한국에 대해서도 북한과의 대화를 준비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이해 가을에 3선 개헌을 성사시켜 종신 집권의 터전을 닦기 시작했으나 10년 뒤인 1979년에 궁정동의 비극으로 종말을 보았다.

▼ 인류사회에 능동적 이바지 ▼

닉슨 독트린이 궁극적으로 겨냥했던 냉전체제의 해체는 그때로부터 20년 뒤인 1989년에 구체화됐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그것에 따른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과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몰타선언은 냉전이 무너지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열렸음을 예고했다. 이 해에 국내에서 문익환(文益煥) 임수경(林秀卿) 등 재야 인사들에 의해 법의 테두리 밖에서의 방북 통일운동이 잇따랐음은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다.

이러한 거시적 안목에서 우리는 1900년대의 ‘아홉수 해’에 민족사와 관련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조명하기로 한다. 임시정부의 꿈인 민주적 통일정부가 어떻게 하면 2000년대의 초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면서.

김학준(동아일보 논설고문·인천대 총장)

◇ 한국 현대사 주요사건 연표

▼ 1919년

(1)2·8독립선언(2월8일)〓일본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 3·1운동의 시발점.

(2)3·1독립운동(3월1일)〓33인이 한국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고하면서 전국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 독립운동의 전기.

(3)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4월10일)〓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정 출범. 3권분립에 기초, 국내외에서 치열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

▼ 1929년

(4)광주학생운동(11월3일)〓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항일운동. 일본인 학생의 한국인 여학생 희롱에 분노한 광주지역 학생들이 봉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

▼ 1949년

(5)백범 김구 암살(6월26일)〓항일독립투쟁에 몸 바치고 통일정부 수립에 헌신한 김구, 안두희의 총에 맞아 사망.

▼ 1959년

(6)조봉암 사형(7월31일)〓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광복 이후 진보당 당수로 활동하던 조봉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

▼ 1969년

(7)3선개헌(10월17일)〓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영구 집권 기도.

▼ 1979년

(8)박정희 시해(10월26일)와 신군부 쿠데타(12월12일)〓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등장.

▼ 1989년

(9)문익환 방북(3월25일)과 임수경 방북(6월30일)〓재야 인사들 방북으로 법 밖에서의 민중 통일운동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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