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11돌]「고문치사」 本報특종 역사바꿨다

  • 입력 1998년 6월 9일 19시 44분


“조사경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치니 박종철군이 ‘억’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차속에서 숨졌다. 외상은 전혀 없었고 쇼크사로 본다.”(87년1월15일 경찰발표)

“관계자에 따르면 박군의 뒷머리 등 온몸에 피멍이 있었고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것.”(87년1월16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

“박군을 처음 검안한 의사 오연상씨에 따르면 박군을 조사실에서 처음 보았을때 이미 숨진 상태였고…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으며…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고… 조사실에 도착했을때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는 것.

한편 박군의 시체부검에 입회한 의사는 박군의 목에 1㎝가량의 피멍이 있었다고….”(87년 1월17일자 사회면)

박종철군 사건에서부터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의 5개월. 그 민주화를 향한 대장정 속에는 독재정권의 은폐 기도에 맞서 양심을 지킨 의인(義人)들의 증언, 그리고 진실을 용기있게 파헤친 동아일보가 있었다.

87년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숨지자 경찰은 “박군이 전날 술을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마시고…” 운운하며 어떻게 하든 단순 쇼크사로 몰아가려고 기를 썼다. 그러나 사건발생 직후부터 부검의, 최초 검안의, 경찰관계자, 박군 가족 등을 집요하게 접촉한 동아일보 취재진에 의해 거짓은 꼬리를 물고 탄로난다.

동아일보는 박군이 고문을 당해 숨졌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 16,17일자 특종보도에 이어 19일자엔 당시 12면중 무려 6개면을 박군 사건의 진실로 가득 메운다. 전두환정권도 마침내 고문사실을 인정하며 경찰관 2명을 구속했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다시 초강경 자세로 돌아가고 민주화운동은 잠시 위축된다.

그러나 다시 민주화의 물결을 터뜨리는 ‘용기있는 입과 글’. 5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가담자가 3명 더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검찰은 하급 경찰관 3명을 더 구속한 뒤 불씨를 끄려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양심적인 한 제보자의 도움을 받아 5월22일 1면 톱기사로 “축소조작에 박처원(朴處源)전치안감 등 고위간부 3명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특종 보도했다. “추가구속된 3명이외에 더이상의 배후는 없다”던 정부 발표내용을 정면으로 뒤엎은 것. 결국 26일 장세동(張世東)안기부장 정호용(鄭鎬溶)내무 김성기(金聖基)법무장관 서동권(徐東權)검찰총장 이영창(李永昶)치안본부장이 경질됐고 30일 박전치안감 등 3명이 추가구속됐다.

야만적인 고문치사에 이어 밝혀진 후안무치한 은폐조작 실상…. 들끓던 민심은 마침내 6월10일 전국에서 활화산처럼 타올랐다.동아일보의 용기있는 진실보도는 4·19에 이어 6·10시민항쟁에서도 큰 몫을 했다.

〈이기홍기자〉l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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