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남북회담 사료 3차 공개…7·4 공동성명 ‘비밀접촉’ 과정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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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7월 6일 10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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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3일 평양을 찾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1972년 5월3일 평양을 찾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정부는 6일 그간 비공개였던 ‘남북회담 사료’를 세 번째로 공개했다.

앞서 통일부는 지난해 2차례 1970년대 초반 남북회담 사료 일부를 공개했다. 통일부는 남북회담 문서 공개는 지난해 1월 제정·시행된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통일부 훈령)에 따른 것이다.

이날 공개한 자료는 ‘남북대화 사료집’ 제7~8권에 수록된 △남북 비밀접촉 △7·4남북공동성명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 △남북조절위 회의 △남북조절위 부위원장회의 회의록이다.

1971년 한창 진행 중이던 적십자 예비회담에서 북측이 정치적 문제를 제기하며 회담이 난항을 겪자 남측은 북측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별도로 접촉을 타진한다. 북측은 이에 ‘정치적 대화’를 위한 비밀접촉을 갖자고 제의하며 남북은 1971년 11월20일부터 1972년 6월1일까지 판문점에서 11차례 실무접촉을 비공개로 갖는다.

이를 통해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과 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이 각각 1972년 3월, 4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등 고위급인사의 회담을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이 부장의 평양 방문을 확정하는 등 남북의 고위급 대화도 급물살을 탔다.

이후락 부장은 같은해 5월2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부장과 고위급 회담을 가졌다. 이 부장은 김일성 주석을 2차례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서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부장과 김 부장은 1972년 7월4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4 남북공동성명에는 △자주적 해결, 평화적 방법 등 통일 원칙 △비방 및 무장도발 중단, 군사적 충돌 방지 위한 적극 조치 △남북 간 교류 △서울-평양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의 내용이 담겼다.

남북은 이 부장과 김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 10~11월 판문점, 평양, 서울에서 차례로 3차례 공동위원장 회의를 진행했다. 조절위원회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 △남북 간 광범위한 정치적 교류 △군사적 충돌방지·대치상태 해소 △대외활동시 남북 공동보조로 민족적 긍지 선양 등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다. 다만 남한 내 UN군 주둔, 반공 등 상황에 북측이 문제를 제기하며 의견 대립을 겪기도 했다.

남북조절위는 1972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3차례 본회의를 열었지만 의견 대립 끝에 성과 없이 종료됐다.

남북조절위 회의가 중단된 뒤 북측이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위원회를 구성하면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하고 남측이 호응하며 1973년 12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자유의 집과 판문각을 오가며 10여차례 열린 남북조절위 부위원장 회의록도 이번에 공개됐다.

그러나 북측은 조절위에 당국자, 정당인, 사회단체 인사, 각계각층 개별인사를 참여시켜 ‘대민족회의’로 확대하려고 했고, 남측은 북한이 조절위를 ‘체제선전장’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고 반대하면서 부위원장 회의 역시 진전이 없었다.

회의 기간 중 남측 경찰 경비정 포격 격침 사건, 대통령 저격 사건, 남침용 땅굴 발견 등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남북관계는 악화됐다. 남측은 땅굴 철거·구축 중지, 대남 삐라 살포 금지, 군사도발 금지를 제의했지만 북측은 남측의 조작·도발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대립했다.

남북은 10차 회의에서 1975년 5월30일 11차 회의를 열기로 합의했으나 북측이 회의 하루 전날인 5월29일 연기를 통보하고, 회의를 계속 거부하면서 부위원장회의마저 중단되고 말았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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