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정책 실험대상 된 공공기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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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변화 이끌려면 본보기 돼야”… 블라인드 채용-비정규직 정규직화
구체 효과 검증도 없이 밀어붙여… 국책연구원들까지 “부작용 우려”

정부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채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실험적인 고용정책을 잇달아 밀어붙이면서 ‘공공기관이 실험 대상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당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민간 분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기관 채용정책이 구체적인 효과 검증 없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공공부문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능력 중심 사회를 강조하는 새 정부의 기조를 공공부문이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문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지 2주 만인 7월 5일 ‘평등한 기회·공정한 과정을 위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332개의 모든 공공기관이 7월부터, 149개 지방공기업은 8월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한다는 게 골자였다.

불과 2주 만에 취업준비생들이 선망하는 공공기관의 채용방식이 급격히 바뀌자 공공기관 입사를 준비하던 수험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공공기관들이 전형 방식을 확정하지 않았는데도 서울 노량진 등의 일부 학원은 취업준비생들의 불안 심리를 파고들어 각종 강좌를 개설해 수강료를 챙겼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면서 정부에 좀처럼 쓴소리를 하지 않았던 국책 연구원들이 나섰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공공기관 채용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고’에서 “순환보직으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채용으로는 블라인드 채용의 본질적인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부정 청탁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급하게 밀어붙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과 지역인재할당제를 동시에 실시하는 게 모순이라는 지적도 계속됐다. 실력 중심의 채용문화를 만들겠다며 출신지, 출신 학교 등을 가리는 채용 방식을 만들어 놓고 동시에 지역인재를 할당해 뽑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서였다.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는 일자리 정책, 노동시장 정책 등 정권 기조의 뼈대가 되는 굵직한 포부를 내놓으면서 ‘공공부문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표현을 자주 써왔다. ‘민간의 변화를 이끌려면 공공부문이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그럴듯한 포장이 붙었지만, 실상은 동원하기 쉬운 공공기관을 리트머스시험지로 이용하는 것이란 비판이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고졸 채용 의무화, 박근혜 정부의 임금피크제 등은 좋은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민간에 정착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됐다.

세종=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블라인드 채용#정규직화#공공기관#일자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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