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의 오늘과 내일]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의 ‘양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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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장
정용관 정치부장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맨 앞줄에서 주위 사람과 손을 맞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열창하던 당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모습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임을…’의 제창 논란을 떠나 평소 느끼던 법관의 근엄한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기 때문이다.

다음 날 김 권한대행은 문 대통령에 의해 헌재소장으로 내정됐고 7, 8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흥미로운 건 김 후보자가 다른 사건도 아닌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형’ 판결로 뒤늦게 도마에 올랐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사연은 이렇다. 버스 운전사였던 34세의 배모 씨는 1980년 5월 20일 오후 9시경 광주 동구 노동청 부근 내리막길에서 시민군을 태우고 이동하다 경찰 저지선을 들이받아 경찰관 4명을 숨지게 했다.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에 넘겨진 배 씨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을 내린 1심 재판관이 군 법무관으로 복무한 지 10개월쯤 된 27세의 김 후보자였다. 판결은 이듬해 3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32개월 복역 후 사형 집행이 면제돼 출소한 배 씨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 뒤 재심을 청구해 1998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고, 그렇게 잊혀졌던 사건이 국회에서 잠시나마 공론화된 건 2012년이었다. 당시 야당 몫(민주통합당)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사과 용의를 묻는 청문위원들의 거듭된 질의에 “사과보다도 오히려 큰 짐을 지고 있다”는 말로 비켜갔다.

이 문제가 김 후보자의 헌재소장 내정을 계기로 5년 만에 다시 불거진 것이다. 그런데 김 후보자를 둘러싼 여야의 전선(戰線)이 묘하다. 5·18 판결 문제라면 응당 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호남에 기반을 둔 국민의당 쪽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 같은데 아예 논평이나 성명을 내지 않거나 “이해할 만하다”는 반응이다. 광주 5·18 단체들도 “중대 사안이 아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면 ‘임을…’의 제창에 반대했던 자유한국당이 김 후보자의 5·18 판결 문제를 파헤치는 형국이다. 김 후보자가 호남 출신으로 애초 민주당 몫으로 추천됐던 인물이라는 점,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때 유일하게 반대 표결을 한 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헌재의 수장으로서 그의 정치 성향이나 이념 성향은 본질적인 검증 대상이지만 논외로 치자. 궁금한 건 젊은 시절의 김 후보자가 군 재판관으로서 엄혹한 시절 사형 판결을 내릴 당시의 심정, 또 판결 당사자가 18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심정이다.

5년 전 청문회 때 김 후보자는 군 재판관으로 참여하게 된 데 대해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광주 사람으로서 광주항쟁에 참여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재판을 맡게 됐다. 아주 복잡한 입장이었다” 등등의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판결 당시 ‘양심의 갈등’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랬을 거라 믿는다. 다만 김 후보자가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김 후보자는 “사건을 확실하게 검토해서 제 마음의 결단을 정하겠다”고도 했었지만, 배 씨의 딸 증언에 따르면 그 이후 배 씨 가족은 사과의 마음을 전달받지 못한 것 같다.

배 씨는 “최루탄 연기 때문에 앞이 안 보였을 뿐 고의로 사람을 친 게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판사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더군요”라고 했다. 김 후보자는 어제 청문회 서면답변을 통해 “재판을 마친 뒤 원죄(原罪)와도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통진당 당원의 권리까지 고심했던 그가 37년 전의 침묵에 대해 뭐라고 입을 열지 궁금하다.

정용관 정치부장 yongari@donga.com
#문재인#김이수#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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