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의 휴먼정치]보수는 반기문이어야 하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제균 논설위원
박제균 논설위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 당시 반기문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그때 김영삼(YS) 대통령은 지지율 6%를 기록할 정도로 ‘공공의 적’이었다. 그런데 반 수석이 YS의 업적을 칭찬해 장내가 일순 뜨악해졌다. 더구나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였다. 의전수석에 이어 2년이나 정권 말 청와대에 근무한 것도 모자라 ‘YS 찬가’까지 부르는 건 ‘기름장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YS 칭찬은 안 하시는 게 좋겠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행운을 만드는 사람

 반 총장이 남의 험담을 하는 걸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다. 외교가에서 그의 손편지는 유명하다. 정성 들여 쓰되, 받는 사람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담겨 있다. 그의 멘토인 노신영 전 국무총리에게 배운 용인(用人)의 노하우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 파문으로 외교통상부 차관에서 경질됐으나 특유의 근면과 배려로 구축한 인맥으로 돌파했다.


 행운도 따랐다. 노무현 정부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염두에 두었던 홍석현 주미 대사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낙마하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을 옥죄며 후계자의 싹을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낸 이종석의 회고에 따르면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반기문은 청와대에 3배수의 한국인 총장 후보를 내면서 ‘3순위’에 자기 이름을 올렸다. 권력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이번 대선의 구도 또한 나쁘지 않다. 반 총장은 뉴욕을 방문한 충북 의원들과 만나 대통령이 된다면 임기 초에 개헌할 것이며, 2020년 총선에 맞춰 임기도 3년으로 단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념적으로는 보수, 지향점은 개헌으로 ‘반(反)문재인’ 세력을 규합하고, 지역적으로 충청과 TK(대구경북)를 묶으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게 반 총장 측 계산인 듯하다. 4·13총선 전에 “호남이 지지를 거둔다면 정치에서 은퇴하고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공언했던 더불어민주당 문 전 대표는 아직도 호남에서 불안하다.

 그러나 보수에 쓸 만한 주자가 없다고,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지냈다고 보수층은 반기문에게 지지를 보내야 하는가. 반 총장은 ‘통합’과 ‘포용적 리더십’이란 화두를 던진 것 외에 나락으로 추락한 대한민국의 국격을 일으켜 세울 어떤 비전도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 충북 음성의 평범한 집안에서 유엔 사무총장까지 오른 스토리는 드라마틱하지만, 출세가도를 달린 성공담일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되려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사르겠다’는 말뿐인 각오만으론 안 된다. 나라를 위해 어떤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지 몸으로 보여야 한다.

귀국 보고회에 비전 내놔야

 지난 대선은 최선도 차선(次善)도 아닌 차악(次惡)을 고르는 투표였다. 적잖은 보수 유권자도 박 대통령의 과거 행적과 통치능력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문재인 후보의 좌편향과 북에 우호적인 태도를 더 걱정해 박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런 투표가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실패로 판명 난 만큼 반 총장도 보수 표심에 ‘무임승차’하려다간 낭패를 볼 것이다. 1월 중순 귀국 보고회에서도 자기희생과 비전의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면 더 이상 ‘행운’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반기문#노무현#보수#박근혜#대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