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문재인의 ‘원전 판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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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상훈 경제부 차장
 정부는 이번 겨울 최대 전력수요가 8540만 kW에 이를 것으로 최근 예측했다. 추위가 절정에 달할 내년 1월 전국 가정에서 난방기를 틀고 공장들이 정상 가동할 때 예상되는 전력수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발전소 여유분이 충분해 전기 공급은 문제없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런 발표를 접하면서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6년 당시 정부가 세운 ‘제3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새삼 떠올랐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15년간의 미래 전력 수요를 예상하고 그에 맞춰 발전소를 몇 개나 건설할지를 정하는 법정(法定)계획이다. 이 기본 계획에서 2017년 최대 전력수요는 7054만 kW였다. 내년 실제 전력수요 전망과 원전 15기(1기=100만 kW) 생산량만큼 차이가 난다. 

  ‘예측이니 틀려도 그만’이라고 넘기기엔 당시 부정확한 전망이 가져온 피해는 너무 컸다. 고종 24년(1887년)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이래 최악의 전력사고로 꼽히는 2011년 9·15 대정전이 대표적이다. 2006년 전망보다 전력수요가 700만 kW가량 늘어나면서 이를 감당하지 못해 전력 공급이 끊긴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당시 정부는 3년이면 짓는 민간 액화천연가스(LNG) 화력발전소 증설에 매달렸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됐다. 경기 침체로 전기가 남아돌자 정부 계획에 따라 LNG 발전사업에 뛰어든 회사들이 큰 손실을 본 것이다.

 당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더 큰 문제도 뒤늦게 터져 나왔다. 당시 정부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점을 빌미로 원전 추가 증설 계획을 미뤘다. 자신들의 계획에 따르면 전력 수요가 늘지도 않는데 골치 아픈 원전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후 들어선 정부마다 각종 전력사업은 국가적인 갈등 사안이 됐다. 밀양 송전탑 설립 등 전력 관련 사업이 대두될 때마다 각종 단체들이 개입했고 혼란이 이어졌다.

 10년 전 전력수급계획을 굳이 거론하는 건 이달 18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보여준 행보 때문이다.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를 본 문 전 대표는 “판도라가 열리기 전에 판도라 상자 자체를 없애는 노력을 해야겠다. 탈핵 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판도라 상자를 없애는 노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을 당장 폐쇄하면 될까. 지난해 기준 국내 전력생산 중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8%(설비용량 2172만 kW)다. 700만 kW 정도의 수요예측이 어긋나도 블랙아웃이 발생하는데 2000만 kW가 넘는 발전 설비를 없애자는 건 ‘혁명 발언’만큼이나 과격하다.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을 폐쇄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원전을 당장 없애는 것보다는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 역시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설계수명이 가장 빨리 돌아오는 고리 2호기의 수명 만료는 2023년 4월이다. 폐로(廢爐) 결정은 차차기 정부가 결정할 일이다.

 문 대표는 중장기 계획을 미리 세워 대비하자는 취지로 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원자력의 대안부터 밝혔어야 했다. 탄소배출 주범인 화력발전을 늘리긴 어렵고 신재생에너지로 원전을 대체하기엔 갈 길이 멀다. 유럽처럼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에서 돈을 주고 전기를 사올 만한 형편도 아니다.

 일개 시민단체 대표라면 지금 당장 원전을 없애 버리자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 경영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전력 문제는 국민의 주택 냉난방부터 에너지 안보와 국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국책사업이다. 10년 전에 저지른 실수로 수많은 국민이 이미 큰 고통을 겪었다. 이를 반성하기는커녕 원전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정치적인 용도로만 이용하려 한다면 큰 후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전력수급계획#문재인#판도라#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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