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최순실 父 최태민의 정체는?…비선실세 의혹 A to Z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7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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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순실 父 최태민의 정체는?
동아일보 기사로 되돌아본 비선실세 의혹 A to Z



#.2
시작은 1990년 8월 말 청와대로 날아든 한 장의 탄원서였다.
박근령 박지만 씨가 탄원서를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실에 보냈다는 사실은 1990년 11월23일 동아일보 18면(▽)에 실려 세간에 알려졌다.

“사기꾼 최태민(崔太敏)을 엄벌해 최(崔)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 박근혜(朴槿惠)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
-본보 기사(▽)에 실린 박근령 박지만 씨의 탄원서 내용 中



#.3
해당 기사에 실린 탄원서에는 최태민이 당시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을 배후조종해 재벌의 돈을 뜯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이 담겨있었다.

특히 기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또한 집권 당시 이런 의혹을 중앙정보부 보고로 알게 됐고, 당사자 둘을 불러 직접 확인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4
“최 씨의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78년 어느 날 청와대에서 있었던 고(故) 박 대통령의 *친국(親鞫)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5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총재로 있던 최(崔)씨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보고서를 받아든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 내용에 격분, 근혜 양과 최 씨를 불러 직접 *신문을 했으나 근혜 양이 ‘사실과 다르다’며 최 씨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자 신문을 중단하고 오히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1990년 11월23일자 동아일보 18면 '근혜와 근령 사이...최태민 씨는 누구'

* 친국은 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던 일을 뜻하는 표현.
* 신문(訊問)은 알고 있는 사실을 캐어물음이라는 뜻.



#.6
이 문제가 나비효과처럼 이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 벌인 ‘10·26사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7
“김재규 부장은 1980년 1월 항소심공판을 앞두고 재판부에 보낸 항소이유 보충서 중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라는 장에서 이 문제가 10·26 사건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술해놓고 있다.”
-본보 기사 '근혜와 근령 사이...최태민 씨는 누구' 中



#.8
최태민은 1975년 이후부터 당시 큰 영애 신분이던 박근혜와 친분을 쌓았다.
과거 동아일보의 기사를 찾아보면 최 씨가 주최한 종교 활동, 행사에 박근혜가 참석했다는 보도가 1975년 이후 잇따라 나온다.



#.9
* <이미지는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마이스크랩에 등록해놓은 기사 두개>
1. 박근혜 양 참석 구국여성봉사단 양로원 노인과 결연식. 77.2.26 동아일보
2. 근혜 양등 참석 구국선교단십자군 창설. 75.6.23 동아일보



#.10
이후 둘 간의 특별한 친분 관계를 놓고 각종 의혹이 불거져 나왔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그때까지만 해도 최태민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줄만한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11
그렇게 1980년대 신군부의 집권 이후 최태민을 주목하던 세간의 관심은 한동안 시들해진다. 그러던 중 2007년 6월, 신동아는 ‘박근혜 X파일 & 히든카드’라는 제목의 기사를 낸다.

베일에 감춰져 있던 최태민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보고서를 확보해 정리한 내용이었다. 앞서 설명했던 1990년 11월23일자 본보 보도에서 언급된 ‘중앙정보부의 조사보고서’였다.



#.12
이 보고서에는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최태민의 출생과 성장배경, 경력, 박근혜를 만나게 된 과정, 구국여성봉사단 창설 이후의 부정행위 의혹, 여성 추문 등이 A4지 16장 분량으로 상세히 적혀있었다.

해당 기사에 실린 보고서에 따르면 최태민은 1912년 5월5일생으로 황해도 봉산군 출신이다. 특이사항은...



#.13
그가 7개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인데 그 이름의 변천사 속에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도원(崔道源): 선녀가 지었다는 아명
최상훈: 월남 후 개명, 경찰 육군 및 해병대 비공식문관 재직 시 사용
최봉수: 부산 거주시
최퇴운: 법명
공해남: 천주교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 시 사용
방민: 계시에 의해 개명했다고 자칭
최태민: 75.4 대한구국선교단 총재 취임계기 개명.



#.14
최태민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황해도경 순사’로 재직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그는 월남해 최상훈으로 개명한 뒤 강원도경 소속 경찰이 됐다. 이어 대전경찰서, 인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겼다가 49년 이후 육군 헌병대와 해병대의 비공식 문관으로 일한다.



#.15
6.25전쟁 때인 51년 3월. 최태민은 주 활동무대였던 군(軍)을 떠나 최봉수란 이름으로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이 됐다가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부산)을 지낸다.

그가 종교계에 발을 들인 건 1954년 초순이다. 당시 부인 김제복과의 불화로 경남 동래군 금화사로 도피한 그는 삭발을 한 뒤 최퇴운이란 새 이름을 내걸고 승려가 됐다.



#.16
이후 그의 행적은 교육계와 종교계와 정치계를 넘나든다.

· 55년. 경남 양산군의 비인가 학교인 개운중학교 교장
·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
· 63년 5월.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 중앙위원 선임



#.17
그의 기행이 돋보이기 시작한 건 1965년 1월이다.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최태민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돼 4년간 도피생활을 한다.



#.18
1969년에 도피를 끝낸 뒤 천주교 불교 기독교를 결합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는 천주교 중림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뒤 1971년 10월에 서울 영등포구 호국사에서 영세계의 교리라 주장하는 ‘영혼합일법’을 제창한다.




#.19
1974년부터 그는 ‘태자마마’를 자칭했고 이듬해 3월 6일, 고(故) 육영수 여사를 거론하며 큰 영애 박근혜 처음 만난 뒤 대한구국선교회를 창설했다.





#.20 #21.
큰 영애(당시) 박근혜와 친분을 맺은 최태민은 이후 각종 비위를 저지르며 이권을 챙긴다.






#.22
신동아는 또한 “보고서는 비위 행위 이외에 여성 추문 의혹 12건을 기록했다”고 밝힌다.



#.23
이후 기사 내용을 종합해보면 79년 이후 집권한 신군부 정권은 최태민을 수사한 뒤 자숙하라는 뜻으로 강원도에 보낸다. 이후 잠잠하던 최태민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0년 육영재단 고문으로 재기한다. 당시 재단의 이사장은 박근혜였다.

기획/제작: 김재형 기자·조성진 김수경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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