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조차 “어, 예쁜데” 비아냥… 여풍당당 ‘차수현’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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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 창설 70년… 현장선 여전히 ‘약자’

드라마 ‘시그널’ 속 차수현 형사
드라마 ‘시그널’ 속 차수현 형사
한 케이블TV 드라마 ‘시그널’에 등장하는 여형사 차수현(김혜수)은 언제나 당당하다. 거친 강력범을 쫓으며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범인을 추적하다 범죄 피해자가 돼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사건도 겪는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강력계 형사로 활약하다 장기미제전담팀을 이끈다. 어린 여학생들이 “나도 저런 멋진 형사가 되고 싶다”고 부러워할 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확연히 다르다. 1946년 80명으로 출발한 여성 경찰관은 올해 창설 70주년을 맞았다. 전체 경찰관의 10%에 이르는 1만 명의 여경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여경들은 ‘여성’이라는 한계가 여전하다고 하소연한다.

○ 10명 중 1명이지만 현장에선 아직 ‘약자’

올해로 창설 70주년을 맞은 여경은 공권력을 행사할 때마저도 여성이라고 깔보는 일부 피의자나 민원인을 상대하고 조직 내 위상을 더 높여야 한다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서울 마포대교에서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소속 여경이 자살을 시도하려던 여고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지난달 말 서울 마포경찰서 관내 한 지구대에 한 40대 남성 취객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지구대에 있던 젊은 여경을 가리키며 “내가 결혼도 안 했는데 예쁜 여경이 있어서 들어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빵 좀 사왔는데 여경한테 주고 가야겠다. 여경에게 커피 한 잔 얻어먹어야겠다”고 떼를 썼다. 다른 경찰까지 모두 나서서 말렸지만 피의자도 아니라 강제로 쫓아낼 순 없었다. 이 취객은 기어이 자신이 콕 찍었던 그 여경이 타준 커피를 마시고 떠났다. “여경이 직접 타줘서 그런지 커피가 참 맛있다”는 얘기까지 남겼다.

여경들이 근무 중에 성희롱이나 무시를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피의자한테 이런 일을 당하기도 한다. 3년 차 여경인 장모 순경은 지난해 12월 절도 피의자를 체포하러 갔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장 순경은 “수갑을 채우는데 피의자가 실실 웃으면서 ‘어? 예쁘네?’라고 말하고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라”라며 “현장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기분 나쁜 기억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원인이 ‘아가씨’나 ‘계집애’(‘여자아이’를 낮잡아 부르는 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따로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지방경찰청 성희롱 고충상담센터 관계자는 “정도가 심하면 고소할 수 있지만 웬만한 건 감내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업무 방해로 보기 어려운 언어폭력과 성희롱은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하기도 힘들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 3년 차 여경은 손을 더듬는 피의자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자 주변에서 “뭘 그렇게 까다롭게 일하냐”는 반응을 보여 황당했다고 털어놓았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해결이) 어려운 문제”라며 “여성 경찰관이 전문적인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꾸준히 보여주면서 성희롱 등이 있으면 정해진 범위 안에서 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 ‘신입 여경’ 홍보용으로 악용하기도


경찰 조직 내에서 여성의 위상과 역할은 남성과 다르다. 비교적 거친 조직 문화 속에서 수시로 범죄자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여경에게 별로 유리하지 않다. 한 10년 차 여경은 “강력팀에 지원하려 해도 여경을 잘 받지 않는다”며 “강력범은 남성이 많기도 하고 차 안에서 같이 오랜 시간 잠복할 때 여성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다는 생각도 있다”고 했다.

‘주간-야간-비번-휴무’ 식의 교대 근무를 많이 하는 특성 탓에 출산과 육아 부담이 큰 여경이 강력팀 등 격무 부서에서 일하기가 기본적으로 힘들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부 경찰인 정모 경사(34)는 “내가 교대 근무를 하는데 아내마저 그렇게 일하면 가정은 누가 지키겠느냐”고 얘기했다.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두 사람이 모두 형사 업무 등을 맡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경찰이자 경찰의 남편으로 일하면서 여경이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강력팀 등에서 일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경을 홍보 목적으로 우선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충북 청주시의 한 지구대에서는 신입 여경이 택배기사로 위장해 수배자를 검거한 것처럼 홍보자료를 냈다가 거짓으로 드러나 관련 경찰관들이 징계를 받았다. 홍보 효과를 노리고 ‘새내기 여경의 활약’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경찰은 여성의 장점을 살리는 인사 등을 통해 여경의 역할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같은 문제는 여성 경찰관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으로 꼽힌다”며 “사회 전반의 문제와 연결돼 있어 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차별 없이 각자의 희망과 여성의 특징을 고려하면서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도형 dodo@donga.com·이지훈 기자
#여경#경찰#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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