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命]권노갑 회고록<12>정동영의 이율배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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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몰아칠것 같으니 잠깐 피하시죠” 그 얼마뒤…

2001년 6월 김대중(DJ)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총재 자격으로 최고위원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정쇄신을 약속하고 있다. 권노갑 최고위원은 이미 2선 후퇴를 하고 난 다음이다. 왼쪽부터 정동영, 박상천 최고위원, 김대중 대통령. 동아일보DB
2001년 6월 김대중(DJ)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총재 자격으로 최고위원 회의를 주재하면서 국정쇄신을 약속하고 있다. 권노갑 최고위원은 이미 2선 후퇴를 하고 난 다음이다. 왼쪽부터 정동영, 박상천 최고위원, 김대중 대통령. 동아일보DB
○바른정치 실천모임

어쨌든 2000년 8월 30일 치러진 경선에서 정동영 의원은 청년층 대표 몫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고, 나는 대통령 임명직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 후 최고위원이 된 정동영 의원이 정동채 의원과 함께 나를 찾아와 ‘바른정치 실천모임’을 결성했다고 얘기했다.

“누가 모이나?”

“우리 두 사람하고 천정배, 신기남, 김한길, 김민석, 정세균 등 7명입니다. 이 모임은 첫째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열심히 돕는 것이고, 다음은 정권 재창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뜻이다. 앞으로 서로 잘 협력해 나가자.”

나는 그들 모임의 취지에 적극 찬동했다.

그러나 그해 9월 김한길 의원이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고, 김민석 의원도 무슨 일로 빠지고 해서 구성인원은 5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5명도 내가 공천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정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람들이라 전부터 그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들이 모여 일할 사무실을 마포에 마련해주고 매달 운영비도 보태주었다.

당내에서도 그들과의 관계는 긴밀했고, 골프도 같이 치고 모임이 있으면 같이 만나기도 하면서 서로 간에 말없는 존경과 사랑이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묘한 발언

2000년 연말경 정동영 의원이 내게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저녁 좀 사주십시오.”

“회원은 다 나오나?”

“네, 다 나옵니다.”

그러나 막상 약속장소엔 정동영, 정동채 의원 두 사람만 나왔다. 저녁을 마칠 무렵 정동영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권 최고위원님, 제가 그동안 초선의원 13명을 만나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권 최고위원님을 ‘부통령’이라고 부르고, ‘제2의 김현철’이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이권과 인사에 개입한다는 평을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허허 웃었다.

“그럼 정 최고, 자네도 초선의원들처럼 내가 부통령이고 김현철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 의원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초선의원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이해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자 정 의원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폭풍우가 몰아칠 것 같으니 잠깐 피해 계십시오.”

“폭풍우가 몰아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그에 앞서 지금 자네가 전해 듣고 내게 하는 말은 실체가 있는 말인가? 자네가 하는 말은 내가 김현철처럼 정권을 농단하고 인사에 개입하고 비리를 저질렀다는 뜻 같은데, 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무슨 부정부패를 했고, 무슨 비리에 연루되었으며, 무슨 비합법적인 인사에 개입했으며, 무슨 정권을 농단하는 일을 했단 말인가? 지금까지 온갖 게이트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며 무슨 비리가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실상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나를 모든 비리의 원흉인 것처럼 공격하고, 동아일보에서는 시중에 나도는 KKKP 의원이 바로 권노갑, 김홍일, 김옥두, 박준영이라고 실명보도까지 했다. 그래서 당에서는 ‘한나라당 흑색선전 공작정치 근절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 위원회의 위원장이 바로 정동영 의원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바로 그 대책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도 하고 검찰에 민·형사 소송도 하지 않았는가? 한나라당 주장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추진한 것인데 지도자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가 떠돈다고 부화뇌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만일 자네도 같은 생각이라면 대책위원장을 하지 말든가 해야지, 이 무슨 이율배반적 행동이고 자기모순적인 말인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정동영 의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그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움직인다고 내가 겁낼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는 헤어졌다.

○청와대 회의

며칠 뒤인 12월 2일 저녁 청와대에서 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의 주재하에 최고위원 회의가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타러 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최고위원들이 돌아가면서 당내 사정에 대해 한마디씩 했으나 나는 그날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제일 마지막이 정동영 최고위원의 차례였는데, 그는 자기 차례가 오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 권 최고위원이 계시지만, 시중에서는 권 최고위원에 대해 부통령이니 제2의 김현철이니 하는 여론이 있습니다. 공기업 인사를 비롯해 당정 인사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비리의혹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당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대통령의 몇몇 측근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권 최고위원이 2선으로 물러남으로써 당의 면모를 일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두 눈을 감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자리를 떴고, 회의는 그걸로 끝나고 말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자리에 남아 이야기를 더 나누었지만, 이날 발언을 비공개로 한다는 약속을 한 뒤에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 참으로 무정한 것, 정치 ▼
침묵했던 DJ “이 사람아, 그때 왜 아무 말도 안했어”


김대중(DJ) 대통령은 정동영 최고위원의 발언에 아무 대꾸도 않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DJ의 흉중(胸中)엔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DJ 사후(2010년)에 출간된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 12월 17일 권노갑 최고위원이 사퇴했다. 성명을 발표하고, 그것이 순명(順命)이라고 했다. 그는 당내의 2선 후퇴 주장에 시달려왔다. 최고위원 한 명은 내 앞에서 그의 퇴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이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를 보내기로 했다. 따르는 동지들과 눈물의 회동을 했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정치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다.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 세인의 관심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찬을 함께했다. 그의 순명을 다시 위로했다.”

정 최고위원의 주장이 ‘순수해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와 ‘정치란 참으로 무정한 것이다’라는 노(老) 대통령의 감상, 그리고 ‘권노갑의 순명’에 대한 애잔함이 묻어나는 구절이지만, 청와대에서 최고위원 회의가 열렸던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최고위원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청와대를 나가고 난 다음, DJ는 권 최고위원을 따로 불렀다.

“이 사람아, 거기서 왜 아무 말도 안 해? 정동영 최고위원 얘기는 자네가 아니라 바로 나를 겨냥한 것이야! 왜 그걸 몰라?”

세월이 흐른 뒤 권 고문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대통령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른다. 아마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싶다.”

DJ는 그렇게 화를 낸 뒤 “자네는 남아서 당을 수습하게”라고 지시했다. 권 최고위원은 허탈했다. 당을 수습하라는 지시는 당연한 것이었다. 허탈했던 건 그 때문이 아니라, 불과 5일 뒤면 대통령을 모시고 노벨평화상 수상식 참석차 노르웨이로 출국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턱시도와 보타이까지 준비해놓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 돌아볼수록 만감이 교차했다.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했다. DJ가 당선되던 1997년 12월 18일, 권 고문은 한보사건으로 구속 수감돼 병보석 중이었다.

“건강은 점점 악화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다리가 부어올라 당뇨환자에게 절대 필요한 운동은 꿈도 못 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대선에서 내가 반평생을 한마음으로 보필해온 김대중 후보를 옆에서 돕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나를 끝없이 괴롭혔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병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권노갑의 1999년 회고록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에서)

노벨평화상은 대통령 당선만큼이나 DJ와 권노갑이 함께 꿈꿔온 영광이었다. 그런데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권노갑의 순명(順命)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권노갑#정동영#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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