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로 가는 길]<6>이스라엘 창업 네트워킹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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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돌며 한달간 투자 구애… 벤처자금-멘토 함께 확보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아하드 하암 거리에 있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IDC엘리베이터’에서 창업가들이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이곳의 창업가들에게는 미국 투자자에게 사업 모델을 소개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텔아비브=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아하드 하암 거리에 있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IDC엘리베이터’에서 창업가들이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이곳의 창업가들에게는 미국 투자자에게 사업 모델을 소개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텔아비브=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이스라엘 텔아비브 시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힐라 오빌 브레너 씨(38·여)의 인생은 11년 전 확 바뀌었다. 영어 문장의 문법 오류를 수정해주는 화이트스모크라는 교육서비스 업체를 창업하면서부터다. 그는 2011년 회사를 나스닥에 상장시켜 1500만 달러(약 162억 원)의 평가이익을 실현했다. 그 후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 개발회사인 키다운로드를 창업해 ‘연쇄 창업가(serial entrepreneur)’의 길에 들어섰다.

지난달 16일 텔아비브에서 브레너 씨를 만나 창업가로 변신한 계기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이스라엘에선 누구든 쉽게 창업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networked people).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멘토도, 투자자도 쉽게 만날 수 있죠.”

○ 사업 아이디어-투자자 연결 생태계 튼튼

이스라엘의 인구 대비 창업자 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해외의 투자자를 만나기도 쉬운 창업 생태계 덕분이다. 이스라엘은 동아·베인 창조경제(DBCE)지수의 창업 인프라 분야 평가에서 35개국 중 4위에 올랐다. 한국은 17위였다. 한국은 창업을 돕는 행정 처리 속도 등에서 이스라엘에 앞섰지만 사업 아이디어와 투자자를 연결하는 벤처 생태계에서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자의 눈에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창업 아이디어를 파는 거대한 세일즈 회사 같아 보였다.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뛰어난 아이디어를 외국의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들의 지상 과제다. ‘실리콘 와디’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창업 생태계는 특히 미국 실리콘밸리(캘리포니아) 및 실리콘앨리(뉴욕)의 투자자들과 가깝게 연결돼 있다.

지난달 17일 텔아비브의 ‘테헤란로’ 격인 로스차일드 거리 인근의 한 빌딩 지하. 벤처 액셀러레이터(육성 전문기업)인 ‘IDC엘리베이터’에 입주한 창업가 오하드 프랑크푸르트 씨(28)가 창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는 2년 전 한 차례 창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실패 원인에 대해 그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과 네트워킹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IDC엘리베이터는 그에게 2만 달러의 초기 자금과 4개월짜리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강의를 들으며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3개월 과정에 이어지는 마지막 한 달에 있다.

벤처 창업자들은 미국 뉴욕에 거처를 잡고 한 달 동안 투자자, 기업가와 연달아 만나며 네트워킹에 주력한다. 프랑크푸르트 씨는 이 기간에 만난 투자자에게서 수억 원의 투자를 받고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투자 여력이 커도 다른 사람의 돈(OPM·Other People's Money)으로 사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해외 투자자들에게 사업 아이디어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창업 강국, 네트워킹에서 나온다

이스라엘을 창업 강국으로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고리는 군대다. 탈피오트, 8200부대와 같은 엘리트 부대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인재를 발굴한다. 고교 졸업 후 이런 부대에 스카우트된 엘리트들은 수준 높은 통신, 보안기술을 습득하며 자연스럽게 창업을 준비한다. 이스라엘에서 만난 창업가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시절부터 창업 문화를 경험하고 △군대에서 첨단 기술을 배운 뒤 △제대 후 마이크로소프트 등 260여 개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R&D) 센터에서 경험을 쌓으며 ‘창업 DNA’를 갖게 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태 주이스라엘 대사관 산업관은 “이스라엘 창업가들은 경험도, 네트워크도 없이 패기만으로 도전하지 않는다”며 “해외 투자자들과 쉽게 연결되는 네트워크, 어릴 때부터 쌓은 비즈니스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서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미국 실리콘밸리, 핀란드 등 창업 강국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바로 네트워킹의 힘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로 꼽히는 비키를 창업한 호창성 대표는 스탠퍼드대 경영학석사(MBA) 수업에서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를 소개한 뒤 투자자를 만나 창업에 성공했다. 그는 이 순간을 “돈이 아니라 열정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만난 것”이라고 표현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을 지원하는 유누들의 레베카 황 대표는 “요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창업자들은 한곳에서 많은 투자를 받기보다 여러 명한테 조금씩 투자받기를 바란다”며 “이는 여러 멘토와 네트워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 “정부는 초기에만 도움 줘야”

이스라엘이 세계 최고의 창업 네트워크를 만든 데는 정부의 역할이 컸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하면서 100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주로 과학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갑자기 쏟아진 고급 두뇌들을 방치하지 않고 초기자본을 대는 요즈마 펀드를 만들어 창업에 나서게 했다.

이스라엘 전문가들은 정부가 요즈마 펀드로 지원한 것도 중요하지만 1998년 민간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넘기고 빠져나와 민간 주도의 후속 투자가 이어지도록 유도한 것이 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수많은 다국적 기업이 이스라엘 기업을 사들이려고 들어오며 벤처 생태계가 조성됐다. 2003년부터 2012년 사이 이스라엘 기업이 기업공개(IPO)로 얻은 이익은 36억3300만 달러에 그치는 반면 기업 인수합병(M&A)으로 얻은 이익은 416억2200만 달러에 달한다.

R&D 투자 정책을 결정하는 수석과학관실(OCS)도 민간 인큐베이터들이 투자 분야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 계약을 맺은 인큐베이터들이 창업가를 발굴하면 OCS는 성장 가능성 등을 심사한 뒤 투자를 결정하는 구조다. ‘IT 839 정책’, ‘6T 정책’ 등 정부가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로봇기술(RT) 등 유망 분야를 선정하는 한국식과는 전혀 다르다.

민간 인큐베이터인 킨롯 벤처스의 아사프 바르니 CEO는 “정부는 사업모델을 판단해 성공으로 이끌 능력을 갖지 못한다”며 “사업 초기 리스크가 발생하는 부분을 책임져줄 뿐 투자가 발생하고 기업이 성장하는 부분은 철저히 민간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텔아비브=김용석·헬싱키=박창규 기자 nex@donga.com
▼ 이스라엘판 ‘페이팔마피아’ 창업 선순환 일등공신 ▼

성공한 창업가들 에인절 펀드로 지원


평범한 외모의 50대 여성 이리트 이스라엘리 카하나 씨는 이스라엘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여러 곳에 최대 100만 달러씩 투자하는 ‘큰손’이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 유명 소프트웨어 기업인 암덕스(AMDOCS) 창업에 참여했던 그녀는 암덕스가 나스닥에 상장된 뒤 지분을 팔아 큰돈을 벌었다.

이후 그녀는 암덕스를 퇴직한 임직원 50여 명과 함께 에인절 투자자 그룹 ‘애프터덕스’를 설립했다. 지금은 주로 소프트웨어 분야 후배 창업가들을 찾아 초기 자금을 투자하는 일을 한다. 이스라엘에서 창업하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초기 벤처에 투자하는 것이 원칙이다.

에인절 투자를 시작한 이유는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 이외에 암덕스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는 최근 텔아비브보다 발전이 더딘 나사렛 지역의 창업가와 아랍계 이스라엘인 창업가에 대한 지원도 시작했다. 카하나 씨는 “보통 첫 자금으로 2만5000달러 정도를 투자하고, 뛰어난 사업 모델에는 100만 달러까지 투자한다”며 “초기 창업가에게는 우리가 제공하는 자금과 멘토링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벤처기업의 성공이 또 다른 성공을 낳는 선순환이 이스라엘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미국 페이팔의 창업 멤버들의 주축이 된 ‘페이팔마피아’가 유튜브, 링크드인, 옐프, 핀터레스트, 유누들 등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선순환을 만들려면 창업 성공의 과실을 여러 명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실리콘밸리의 에인절 투자자이자 벤처기업 비드퀵의 최고경영자(CEO)인 버나드 문 씨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성공 이후 스톡옵션으로 큰돈을 번 직원들이 에인절 투자자가 돼 다른 이의 창업을 돕는 에코시스템(기업 생태계)을 한국에선 잘 찾아볼 수가 없다”며 “기업이 돈을 벌었을 때 그 기업만 커지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텔아비브=김용석·새너제이=염희진 기자 nex@donga.com
#이스라엘#창조경제#창업 네트워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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