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잠시 내려놓을 땐 책을 들고 싶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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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도 상병도 왕고참도… 병영도서관에 빠진 군대

강원 화천군 육군 제27사단 통일선봉대대 내의 병영도서관. 소설 4600권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책 8700권이 비치돼 있다. 장병들은 “책의 종수는 적지 많지만 요즘 화제가 되는 베스트셀러는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고 말했다. 화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강원 화천군 육군 제27사단 통일선봉대대 내의 병영도서관. 소설 4600권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책 8700권이 비치돼 있다. 장병들은 “책의 종수는 적지 많지만 요즘 화제가 되는 베스트셀러는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고 말했다. 화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신병훈련소에 8주간 있으면서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과자봉지 뒷면에 쓰인 영양성분 표시나, 행군하다 길에서 주운 신문 조각을 정신없이 읽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정규하 병장은 지난해 초 강원 화천군에 있는 최전방 부대 육군 제27사단(이기자부대) 통일선봉대대에 배치되던 첫날 깜짝 놀랐다. 험준한 화악산(1468m)과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첩첩산중 부대에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작은 병영도서관을 보고서다. “밖에서도 읽지 못했던 신간도서가 가득한 걸 보고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 TV, 스마트폰 대신 책을 읽는 군인들

이 부대에 병영도서관이 생긴 것은 2010년 10월. 신막사를 지으면서 병영생활관 3층에 작은 도서관을 마련했다. 책꽂이에는 시민단체와 국방부, 문화체육관광부, 지역 주민, 부대원들이 기증한 책 8700권이 비치됐다. 병영도서관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렸던 청춘들의 군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게임을 할 수 없는 군대 환경에서 장병들은 처음 맛보는 책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장재호 상병은 이등병 때 병장의 손에 이끌려 도서관을 처음 찾았다. 선임병은 그에게 군 생활에서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며 ‘삼국지 인생전략 오디세이’를 추천했다. 그는 이후 병영도서관에서 매주 1, 2권씩 1년간 50권이 넘는 책을 꾸준히 읽었다. “군 생활을 하다 보면 바깥세상으로부터 잊혀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죠.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불안감의 정체를 알고 나니 거기서 벗어나게 되더군요.”

안경을 낀 앳된 얼굴의 한민기 상병은 요즘 ‘야생화 백과사전’과 구병모의 소설 ‘아가미’를 재밌게 읽고 있다. 한 상병은 “강원도 산골에서 훈련을 받다 보면 야외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은데, 도심에서는 볼 수 없던 꽃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기쁨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최근 국방일보가 장병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병영도서관을 이용하는 군인들의 한 달 평균 독서량은 2.4권이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독서량(한 달에 0.8권, 1년에 9.9권)의 세 배 가까이 되는 수치다.

지난해 병영독서 우수 부대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던 이기자부대도 다양한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분기별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독서왕’과 독후감 경연대회 수상자에게는 3박 4일의 포상휴가를 준다. 또한 지난해 11월에는 강원대 국문학과 정성미 교수를 초청해 병사들과 ‘논어’ ‘징비록’ 등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 책을 읽으면 더 강한 군대가 된다


예전의 군대에서는 내무반에서 최고참 병장이 TV를 보고 있으면 모두들 TV를 봐야 했다. 그러나 올해 8월 말 ‘계급별 병영생활관’ 제도가 시범 실시된 이후 막사의 풍경은 달라졌다. 이 제도는 오후 5시 반 일과시간이 끝난 이후부터 취침시간까지 이등병은 이등병끼리, 병장은 병장끼리 별도의 생활관을 사용하는 제도다. 장병들은 내무반에서도 선임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가시간에 자유롭게 자기계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정훈장교 이상엽 중위는 “요즘 군대에서는 이등병의 얼굴 표정은 크게 밝아진 반면 병장들은 어두워졌는데 이는 제대 후 취업 걱정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부 장병들은 여가시간에 부대 내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인터넷으로 3학점짜리 대학 강의를 듣는다. 병영도서관에 구비된 900여 권의 수험서를 활용해 국가검정기술자격증을 딴 이도 많다.

장건 일병은 지난달 양식조리사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일병이라 내무반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잠을 줄여 도서관에서 밤 12시까지 남아 2주간 공부해 필기시험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정문홍 병장은 제대 후 일본에서 타투(문신) 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봉근주 대대장은 “책을 통해 국가와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전우들과 좋은 생각을 나누고, 미래의 삶에 대한 계획을 실천하는 장병들이라면 더욱 강한 군대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국방부와 문화부는 올해 전군 50개 부대를 대상으로 독서 지도사 파견, 작가 초청 강연, 북콘서트 등을 여는 병영독서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내년에는 130개 부대로 확대할 예정이다. 문영호 문화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장은 “대한민국 60만 장병이 21개월간의 복무기간 중 책 읽는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제대 후에도 독서 습관을 유지하면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천=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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