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도가니 재판’은 낙제점… 채널A가 입수한 서울중앙지법 ‘재판 노하우’에 비춰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5일 03시 00분


청각장애인 수화통역도 없고… 가해자와 대질 증언까지…

채널A가 단독으로 입수한 서울중앙지법 ‘민·형사 재판의 노하우’ 책자.
채널A가 단독으로 입수한 서울중앙지법 ‘민·형사 재판의 노하우’ 책자.
국내에서 가장 큰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이 일부 판사들의 ‘튀는 판결’을 줄이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재판을 하기 위해 판사들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지침서를 만들어 실제 법정에서 적용 중인 것으로 4일 확인됐다. 채널A가 단독 입수한 ‘민사재판의 노하우’와 ‘형사재판의 노하우’라는 두 권의 대외비 지침서에는 △재판 진행 △증거 및 증인 조사 △선고 요령 등 재판 절차에 관한 사항은 물론이고 △판사의 언행 △양형 △특정 유형 사건의 판단 기준까지 망라돼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0일 국회 국정감사 때 내부문건을 통해 “경험이 부족한 판사들을 돕기 위해 이 같은 문건을 제작해 배포했다”고 밝혔다.

○ 증인조사 등 매뉴얼화

최근 영화 ‘도가니’ 개봉 이후 아동 성폭력 사건의 재판 방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다. 영화 속에서 피해 아동이 전문가의 조력 없이 법정에서 피고인(가해자)과 마주하며 증언을 한 것이나 청각장애인들이 수화통역도 없이 재판을 방청한 것 등은 ‘재판의 노하우’ 매뉴얼에 비춰 볼 때 모두 낙제점 재판으로 평가된다.

이 지침서에 따르면 피해 아동의 면담과 진술은 소아과 의사 등 전문심리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신변 보호를 위해 피해 아동이 가급적 법정에서 직접 증언하는 것을 피하고 비디오 등을 통해 증언을 중계하는 형식을 권유하고 있다. 법원 실무관은 미리 피해자들에게 연락해 피고인 측과 법정에서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고 법정 경위가 이들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수화통역은 기본이고 속기사가 실시간으로 법정 상황을 타이핑해 즉시 모니터에 띄우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 정보기술(IT) 적용…시대변화 반영도

‘재판의 노하우’에는 판사들이 법정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도 제시하고 있다. 재판 당사자가 거칠게 항의할 때에는 ‘잠시 방임 후 진중한 톤으로 꾸짖고, 그래도 안 되면 적절히 감치(監置)를 활용하라’는 조언이 대표적인 예다. 또 당사자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면 판사 스스로 마음을 조심스럽게 다잡는 동시에 당사자의 상한 감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의 노하우’에는 시대변화를 반영한 내용도 눈에 띈다. 범행 장소를 확인하거나 교통사고 관련 민사사건을 재판할 때 포털사이트 다음의 지도서비스 ‘로드뷰’를 활용하면 현장검증에 필적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추천해 놓았다. 형사사건에 연루된 피고인이라도 신혼여행을 간다고 하면 가능한 한 출국을 허가하라든가 무임승차나 무전취식 등 경범죄의 경우 판결선고 때 적절한 훈계를 통해 사건 재발을 막을 것도 당부하고 있다.

○ ‘재판 편차, 튀는 판결 줄여라’

‘재판의 노하우’는 이진성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진두지휘로 작성됐다. 지난해 1월 강기갑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국회 폭력 무죄 선고 등으로 ‘하급심 튀는 판결’ 논란이 불거진 직후 취임한 이 법원장은 재판 편차를 줄이기 위해 곧바로 ‘형사재판 노하우 수집위원회’를 구성했다. 판사들로 구성된 위원들은 수개월간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지난해 말 만든 ‘하반기 형사법관회의’자료집에 61쪽 분량의 ‘형사재판의 노하우’라는 문건을 수록해 판사들에게 배포했다. 일선 판사들의 반응이 좋자 올해 3월에는 180쪽 분량의 ‘민사재판의 노하우’라는 단행본도 제작해 실무에 적용하고 있다.

이 지침서에는 결정 직후 즉각적인 효력이 발생하는 가처분 사건의 경우 ‘비슷한 사건을 맡은 판사 간에 협의를 거쳐 판결의 일관성을 유지하라’고 강조하는 등 고른 판결을 요구하는 대목이 많다. 또 부동산 인도나 건물 철거 가처분 신청 사건같이 생활이나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사건을 판단할 때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받아들이라는 식의 ‘판단의 기준’도 제시하고 있다.

널뛰기 판결을 막기 위한 양형 매뉴얼도 제시했다.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즉결심판의 경우 양형 토론을 벌여 형량 편차 발생을 미연에 방지함은 물론이고 이미 심판을 받은 피고인의 형량을 고려해 형평성을 맞추라고 주문했다. ‘형사재판의 노하우’가 수록된 형사법관회의 자료집에는 튀는 판결을 줄이기 위한 ‘양형기준 마련 소위원회 발표 자료’도 붙어 있다. 양형 편차가 큰 명예훼손, 저작권 위반, 유사수신행위 등의 사건에 대한 양형 모델을 제시하는 자료다.

서울중앙지법 합의부의 한 판사는 “재판 진행이나 판단의 기준 등에 대해 판사들 간에 의견이 갈릴 때 주요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며 “특히 갓 임관한 판사들에게는 필독도서로 꼽힌다”고 밝혔다. 이 책자를 살펴 본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일선 판사들이 재판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내용을 집대성해 기준을 제시한 책자”라고 평가했다.

이종식 채널A 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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