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등 없는 한국 지방재정… 곳간 바닥난 뒤에야 ‘빨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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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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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7월 1일 아널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재정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253억 달러(약 30조3600억 원)의 누적 재정적자로 반년 후 재정이 바닥날 것”이라며 주 의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주정부와 의회는 교육 복지 의료부문 예산 155억 달러를 삭감했다. 주립대 등록금이 30%나 오르자 학생들은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는 해법을 찾음으로써 ‘지불유예(모라토리엄)’라는 최악의 파국은 막을 수 있었다.[#2] 이달 12일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이 판교특별회계 차용금에 대한 지불유예를 선언했다. 국내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지불유예를 선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캘리포니아 주와 같은 사전 경고도 없었다. 국토해양부는 “지불유예를 선언할 상황이 아니다. 성남시가 사실을 왜곡, 과장했다”고 반박했다. 행정안전부가 “현행 지방재정법에 지불유예 규정이 없는 만큼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결국 이 시장의 선언은 사실상 무효로 끝났다.
■ 지자체 재정 왜 악화되나… 막을 방법은…

성남시의 지불유예 선언은 이 시장의 정치적인 제스처로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현행 지방재정 감시 체제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지방의 재정은 위기경보 시스템이 미약해 문제가 생겨도 사전에 파악하기 힘들다. 지자체가 중앙정부가 벌이는 각종 사업에 동원되면서 본의 아니게 재정적자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지방재정의 제도적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성남시 사태’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 ‘경고등’ 없는 지방재정

성남시가 지불유예를 선언할 때까지 아무런 경고등이 켜지지 않은 것은 제대로 된 ‘지방재정 진단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재정법 시행령 제65조에서 재정 진단을 받아야 하는 사례를 밝히고 있지만 ‘채무 잔액이 너무 많을 경우’ ‘결산상 세입실적이 예산액보다 현저히 줄었을 경우’ 등과 같이 애매모호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지자체는 돈을 빌리는 데만 몰두할 뿐 돈을 어떻게 갚을지에 대해선 소홀해진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미국의 연방정부는 36개 기본지표를 통해 재정동향점검시스템(FTMS)을 만들고, 지방정부별로 실정에 맞는 지표를 선택해 재정을 자체 점검한다. 재정상태가 어느 수위까지 나빠지면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같이 재정 비상사태라는 점을 밝힌다.

미국은 한 발 더 나아가 가계나 기업과 마찬가지로 지자체의 파산절차까지 구체적으로 정해놓았다. 주정부 기준에 따라 심각한 위기로 진단되면 해당 지자체에 파산관리인을 파견한다. 이때부터 지방자치는 중단되고, 지자체는 파산법원에서 채무조정 계획안을 만들어 채무를 갚아나가야 한다.

프랑스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실시하는 재정분석진단제도에서 채무부담률과 지출경직도 등 4개 지표를 일정한 공식에 대입해 종합점수를 산출한다. 이 점수가 20점 미만이거나 2년 연속 30점 미만이면 상급 단체의 재정건전화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한다.

○ 지방의회의 예산감시 미흡


지자체가 쓰는 돈의 1차 감시자는 지방의회다. 하지만 지자체장과 지방의회의 정략적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손쉽게 지방채 발행을 선택하게 된다. 늘어나는 부채는 다음 지자체장이나 의회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다.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와 사외이사들이 담합해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2006년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16개 시도 광역의회의 의안 처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광역 단체장이 발의한 조례안 가운데 토씨 하나도 안 바뀌고 원안 그대로 통과된 비율이 70.4%였다. 일부 수정된 것까지 포함하면 96%의 조례안이 광역의회를 통과했다.

임주영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지자체장과 의원들이 대부분 민주당인 호남이나 대부분 한나라당인 영남에서는 많은 돈이 들어가는 재정사업들이 의회의 견제 없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폐단을 없애려면 전문성에 기초해 지방의원을 뽑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 지방재정 배려 없는 중앙정부


전문가들은 지자체의 방만한 경영도 문제지만 지자체가 알뜰하게 살림을 하려고 해도 구조적 문제로 재정난이 심각해지는 측면도 많다고 지적한다.

3월 4일 청와대 회의실은 220여 명의 지방자치단체장과 각 부처 장관들로 북적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고용전략회의를 주재하며 “최우선 국정과제인 일자리 창출에 지자체도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당근책도 내놓았다. 행정안전부는 올해 총 500억 원의 인센티브 예산을 확보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지자체에 집중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자체장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강원 지역의 한 지자체장은 “중앙정부가 지방 미분양 아파트의 취득·등록세를 대폭 깎아 지자체 재원을 줄여놓고는 각종 국책사업에 나서달라고 사실상 강요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이 지자체는 올해 세금이 채 걷히기도 전에 수백억 원의 재정사업을 집행하느라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정사업을 조기에 집행하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방재정을 악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는 복지서비스의 지방 이전이다. 정부는 2005년 정부가 부담해오던 복지서비스 중 일부를 지방으로 이양하고 별도 교부세를 줬다. 하지만 교부세 금액은 늘어나는 복지수요에 턱없이 부족해 지자체의 지출은 갈수록 커졌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지자체 총예산 중 사회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2년 9.5%에서 올해 19%로 급격히 늘었다. 연평균 증가율도 15%에 달해 총예산 증가율 5.5%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복지서비스를 지자체로 이양한 것은 국민들과 좀 더 가까운 기초자치단체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지자체마다 재정상황이 다른데 동일한 비율로 교부세를 주는 것은 잘못됐다”며 “주민 복지를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업일수록, 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일수록 중앙정부의 지원 비율을 더 높게 하는 방식으로 지원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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