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전 그곳서 다시 본 그 전투, 佛 - 美 노병들 눈가엔 이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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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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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리 전투 재연’ 참관한 6·25 참전용사들

佛 -美 노병과 가족 190명 초청… 중공군 첫 격파 전투 생생 재연
“기억해준 대한민국에 감사” 아내도 남편 등 토닥이며 눈물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지평역 광장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노란색 군복을 입고 등에 붉은색 깃발을 멘 중공군이 꽹과리를 치며 미군 제2보병사단 23연대 소속 프랑스군 대대 방어진지를 향해 밀어닥쳤다. 능선이 아닌 평지에 참호를 판 프랑스 병사들은 중공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중공군이 참호 20여 m 앞으로 다가오자 프랑스 병사들은 일제히 철모를 벗어던지고 함성을 지르며 중공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포탄 굉음과 하얀 연기 사이로 양 측 병사들은 엎치락뒤치락 백병전을 벌였다. 중공군이 퇴각하자 프랑스 병사들은 프랑스기, 성조기, 태극기를 펼쳐 보이며 “만세”를 외쳤다.

이날 전투는 6·25전쟁 60년을 맞아 국방부가 프랑스와 미국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개최한 ‘재연(再演)전투’였다. 육군 제7기동군단 장병 1000여 명, 탱크 12대, 헬리콥터 2대가 동원돼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를 재연했다. 지평리전투는 미군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 3만여 명과 싸워 승리를 거둔 기념비적인 전투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처음으로 격파한 이 전투는 38선 회복과 서울 재탈환의 발판이 됐다. 지평리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포함된 미 23연대는 9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중공군은 5000여 명이 사살되고 79명이 포로로 잡혔다.

지평리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이 뜻 깊은 자리에는 프랑스 참전용사와 그 가족 74명, 미국 참전용사와 그 가족 116명, 국내 참전용사 141명,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인 400여 명, 프랑스 참전용사사업회 관계자 등 24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때 희생 잊지않겠습니다” 국기 전달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역 광장에서 열린 ‘지평리전투’ 기념 행사에서 육군 제7기동군단 장병들이 6·25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위 사진). ‘재연전투’가 끝난 뒤 육군 장병들은 이날 전투를 재연하면서 사용한 프랑스 국기를 프랑스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했다(아래 사진).양평=박영대 기자
“그때 희생 잊지않겠습니다” 국기 전달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역 광장에서 열린 ‘지평리전투’ 기념 행사에서 육군 제7기동군단 장병들이 6·25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위 사진). ‘재연전투’가 끝난 뒤 육군 장병들은 이날 전투를 재연하면서 사용한 프랑스 국기를 프랑스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했다(아래 사진).양평=박영대 기자
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프랑스군전투전적비 앞에 앉아 30여 분간의 ‘치열한 전투’를 지켜보던 프랑스 참전 노병(老兵)들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프랑스 외인부대를 상징하는 검은색 베레모와 감색 정장 차림의 노병들의 가슴에는 태극기와 프랑스 국기를 그려 넣은 배지가 나란히 달려 있었다.

전투 당시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던 레몽 벤나르 씨(81)는 “감격스럽다. 내가 마치 1951년의 전장에 서 있는 느낌”이라며 “수십 년 전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대한민국에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부인 니콜 씨(79)는 남편의 등을 토닥이며 연방 눈가를 훔쳤다. 니콜 씨는 “당시 약혼자였던 남편이 자유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고 했다.

미군으로 전투에 참전했던 윌리엄 걸리번 예비역 대령(82)도 “60년 전 대한민국을 위해 이곳에서 싸웠던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사흘간 중공군에 맞서 싸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이곳에서 옛 전우들을 다시 만나게 돼 매우 감동적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프랑스군전투전적비 주변 곳곳에는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플래카드와 조형물이 가득했다. 태극기 유엔기 프랑스기 성조기가 나란히 걸렸고 행사장 무대 기둥에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우리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란 글귀가 적혔다.

전투 재연이 끝난 뒤 노병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전투전적비에 하얀색 국화꽃을 올려놓은 뒤 전사자들을 기리는 거수경례를 했다. 전투전적비에는 ‘Pour la Libert´e(자유를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로베르 브뢰유 씨(80)는 “우리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6·25전쟁 때 죽은 전우가 너무나 많다”고 가슴 아파했다. 1951년 1월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총 3421명을 파병한 프랑스군은 전사자 262명, 부상자 1008명, 실종자 7명 등의 인명피해를 봤다.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24일 방한한 프랑스와 미국 참전용사 및 가족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지대(DMZ), 임진각, 도라전망대 등을 방문한 뒤 29일 출국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6·25전쟁 때 프랑스대대를 지휘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인 파비엔 뒤푸르 씨(본보 3월 8일자 A4면 참조)와 그 남편도 초청했으나 파비엔 씨의 건강이 좋지 않아 방한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올해 6·25전쟁 60년을 맞아 11월까지 11차례에 걸쳐 참전 21개국 2400여 명을 초청할 예정이다.

양평=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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