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자 절반 ‘급성 스트레스장애’ 고생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2일 03시 00분


■ 추석 상봉 한달… 후유증 호소하는 남측 참가자들

다시 볼 수 없다는 두려움에 우울증-분노-허탈감 나타나
너무 변해버린 가족도 충격… 일부는 건강나빠져 지병 재발


오연화 씨(78)는 요즘 누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도 웃지 않는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여동생(68)을 만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우울증과 무기력감에 시달린다. 5차례 상봉 신청 끝에 들뜬 마음으로 동생을 만나러 갈 때만 해도 후유증의 골이 이렇게 깊을 줄 몰랐다. 오 씨 형제자매는 모두 5남매다. 60년 만에 만난 여동생은 북의 4남매 중 자신만 살았다고 전했다. 오 씨는 다시없을 짧은 상봉 시간에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죽기 전에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상봉 때 동생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려. 나 혼자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파….” 오 씨는 평소 활달한 성격으로 외출도 자주 했지만 요즘에는 우울한 기분 때문에 집 밖에 나가기 싫어한다. 이산가족 상봉 관련 뉴스만 보면 눈물이 나온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 행사(9월 26일∼10월 1일)에서 60년 만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 기쁨도 잠시, 상봉자 중 절반은 오 씨처럼 상봉의 후유증으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중 4명은 후유증으로 인한 생활 불편을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20일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상봉 행사 남측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차 행사에서 북측 가족을 만난 남측 신청자 전원과 2차 행사에서 북측 신청자를 만난 남측 가족 전체(가족당 1명씩)인 195명을 전화로 조사해 183명의 응답을 받았다.

○ 허탈감과 우울증 후유증 호소

상봉자의 49.2%가 북측의 가족과 만난 뒤 후유증이 나타났다고 털어놨다. 후유증으로는 허탈감(47.8%)이 가장 컸다.

북측의 아들과 손자를 만난 석찬익 씨(89)는 상봉이 하룻밤 꿈처럼 스쳐갔다며 헛헛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만나지 못한 아내의 사진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다시 만나지 못할 텐데, 더 살아 뭐하냐는 생각도 든다”는 게 석 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설문조사 결과 이산가족 상봉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겪는 후유증은 우울증, 다시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 건강 악화, 정신적 충격의 지속, 의욕 상실 등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상봉 후유증은 일상생활에 지장(42.6%)을 준다. 고복희 씨(76)는 북측 언니(85)의 앙상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너무 많이 울었다가 백내장이 악화돼 최근 수술까지 받았다. 함께 언니를 만난 여동생들도 하루에 한두 번씩 전화해 언니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울먹인다.

후유증으로 생활 불편을 호소한 상봉자들은 고 씨 자매처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커져 고통을 받거나 지병이 재발해 병원을 찾고, 허탈감으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다시 못 만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살아서 뭐하냐는 생각이 든다’는 상봉자도 12.8%나 됐다.

신영철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교수에 따르면 이런 후유증은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불안과 우울 증상을 보이는 ‘급성 스트레스 장애’와 유사하다.

○ 일회성 상봉은 외상이 되기도

‘급성 스트레스 장애’는 상봉이 외상으로 작용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유사한 증상으로까지 발전한다.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상봉자의 65%가 상봉 이후 오히려 답답하고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 이유로 지금 같은 방식의 상봉행사로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없다(35.2%)는 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일회성에 그친 상봉 행사가 이산가족의 후유증을 유발한 주요 원인인 것이다. 우종민 인제대 의대 신경정신과학교실 교수는 “과거의 트라우마(6·25전쟁으로 인한 장기 이산)를 상봉 뒤 헤어지면서 다시 경험하게 돼 불안과 우울이 발생하는 점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60년의 이산 동안 너무나 변해버린 가족의 모습이 상봉 자체를 떠올리기 싫은 악몽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70대 상봉자는 “행사에서 만난 누나의 표정과 행동이 혈육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낯설고, 진심을 말하지도 않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상봉 이후 답답함과 착잡한 심정을 토로한 상봉자의 26.1%가 북한의 가족이 조심스러워 해 속마음을 제대로 대화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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