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연천]강한 총리가 강한 대통령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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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5분


1980년대 중반 어떤 정부 인사와 우리나라의 국무총리 위상에 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헌법상 행정부 서열 2위인 국무총리의 실질적 권력 서열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대통령을 정점으로 비서실장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보안사령관(현 기무사령관)이 권력의 핵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통령 유고 시 직을 승계하는 헌법상의 위상을 가진 국무총리가 권력의 중추부에 속하지 못하는 일은 반(反)입헌적 구도가 아니냐는 필자의 지적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권력을 만들어 낸 사람과 권력에 의해 임용된 사람은 분명 다르지 않느냐. 권력의 본질은 최고지도자의 신임에 달려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모르느냐.”
그 뒤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쳐 20여 년이 흐르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개선되고 소위 ‘권력의 핵’이라는 자리와 개념은 사라졌지만 그 공백을 국무총리가 메웠다는 증거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국무총리가 어떻게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된 규범이 확립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기에 그동안 대독총리 방탄총리 의전총리 실세총리 등 총리의 별칭이 대통령과 총리의 캐릭터에 따라 변해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조차 국무총리가 자원외교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는 언급이 있었음에 비추어 아직도 국무총리를 내키지 않는 행정 각부 통할자로서 대통령의 구미에 맞는 제한된 역할에 국한하고자 하는 시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헌법상 행정부의 모든 권능은 국민 직선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혹독한 청문회와 국회인준투표를 거쳐 임명토록 함은 물론이고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국법상 문서 행위에 대한 부서(副署)권을 총리에게 부여하고 있음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정 수행의 진정한 파트너로서 국무총리를 활용하라는 국민적 위임임에 틀림없다.
강대국 러시아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대외정책에 있어 치고 빠지기식 역할 분담을 도모함으로써 국익 극대화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초강대국 미국 역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이 대외 국방정책은 물론이고 건강보험 분야까지 중추적 역할을 맡음으로써 대통령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과감히 나눈다.
내년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를 계기로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야 하는 우리나라의 대통령만큼 산적한 난제를 안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사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높으면서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고 정치권마저 해결책을 도출하지 못하는 양상에서 대통령이 외치와 내정을 외롭게 챙기기에는 자연인으로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내각의 수장인 국무총리와 포지티브 섬(positive-sum)을 가져올 수 있는 역할 분담을 모색해야 한다.
단임제 대통령제의 성격상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대외정책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시장에서의 국격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과업에 치중하면서 국무총리로 하여금 정책의 총괄적 조정과 전략의 집행, 대국회 관계 등 내정 부문에 힘을 실어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헌법에 나온 대로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사권이 대통령 고유의 전권이라는 믿음이 확실할 경우 국무총리의 진정한 의지와 정책 조정을 따를 장관은 많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한 총리는 대통령의 통치 역량을 구조적으로 강화하고 국정 수행성과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다. 그런 강한 총리를 만드는 것은 바로 대통령의 실천 의지에 달려 있다.
오연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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