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상근]김정일의 사모곡

  • 입력 2009년 9월 2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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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한생을 두고 감회깊이 추억하시면서 자신께서도 며칠 밤을 밝히고 나면 정 피곤할 때가 있다고, 피로에 몰리여 참기 어려우면 창문을 열고 대성산을 바라본다고, 그러면 어머님의 따스한 손길이 미치는 것만 같고…그만한 피로를 못이겨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고 하시는 어머님의 준절한 말씀이 들리는 것만 같아 정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여 일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누구의 말인지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자. 친구 어머니의 사연부터 얘기해야겠다. 나를 찾아오신 건 1994년 8월이었다. 학생 때와 달리 사회에 나오고 결혼한 이후로는 거의 뵙지 못했는데 동생 문제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했다.

친구 어머니의 동생은 1970년 광원으로 서독에 갔다가 이듬해 5월경 실종됐다. 북한에 갔다고 관계 기관은 판단했다. 체제의 우월성을 놓고 남북이 경쟁하던 시대, 월북자는 대한민국을 배신했지만 북한에서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북한을 탈출한 귀순인사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은 환영했지만 북한은 반역자로 불렀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월북이든 탈북이든 당사자는 어느 한쪽의 품에 안기는 순간 귀한 몸이 된다. 탈북자의 가족은 처형하거나 수용소로 보낸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월북사건이 생기면 정부가 북한처럼 처리하지는 않았지만 남은 가족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당국의 조사와 감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친구 어머니는 며칠 전, 그러니까 7월 30일의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발표문을 꺼냈다. 북한 양심수 58명의 명단과 구금 장소를 구체적으로 공개한 내용이었다. 이 중 49명은 평양에서 70km 떨어진 승호리에 수용됐는데 ‘강중석’이란 이름은 동생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7남매 가운데 여섯째, 유일한 남동생의 이름을 헤어진 지 24년이 지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 명단에서 발견하자 나를 만난 네 자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월북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던 강중석 씨 등 납북자 가족의 사연은 동아일보 8월 3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다시 15년이 지났다. 돈벌어 오겠다며 27세에 떠났던 강중석 씨는 올해 66세다. 친구의 어머니를 포함해 자매는 대부분 칠순 또는 팔순이 됐다. 생사라도 알았으면 하는 게 이분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칼럼의 맨 앞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했다는 말이다. 자신을 낳고 7년 뒤에 세상을 떠난 김정숙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선군태양 김정일장군 3’(평양출판사·2006년)에 담았다.

‘기쁘실 때도 힘드실 때도 붉은 기와 함께 주작봉 마루에 계시는 자애로운 어머님의 동상을 찾으시여 어머님과 마음속대화를 나누시였다…어머님의 탄생 80돐을 깊은 존경과 절절한 그리움의 마음을 안고 맞이하였다…어머님의 슬하에서 혁명의 령도자로, 령장으로 성장하시던 못 잊을 추억을 더듬으시는 그이의 음성은 저으기 갈리시는 듯 싶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포함해 이산가족이 자신 만큼이나 부모형제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지난해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과 관련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마디 더 하기가 정말 어려운가. 이산가족의 생사라도 모두 확인해서 알려 주겠다고.

송상근 오피니언팀장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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