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김대중 선배님은 참 멋있는 사나이”

  • 입력 2009년 8월 21일 17시 38분


김동길 "김대중 선배님은 참 멋있는 사나이"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21일 '김대중 선배님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을 남겨 화제다.

김 명예교수는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김대중 선배님은 오복(五福)을 마음껏 누리신 분이다"고 정의하고 "덕스러운 삶이었기에 한나라의 대통령자리에도 올랐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되셨다"고 밝혔다.

이어 김 교수는 김 전대통령에 대해 "참 멋있는 사나이였다"며 "그런 인물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기에 우리들이 자존심을 지키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고 고인을 한껏 추켜올렸다.

김 교수는 △지난 6월25일에는 "남한에서 북으로 간 달러가 핵무기 개발을 도운 것이라면 그 돈을 가져다준 사람은 마땅히 뒷산에 올라가 투신자살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김 전 대통령을 향해 날을 세우고 △19일에는 김 전 대통령 서거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추종자들이 추태를 부려선 안 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었다.

다음은 김 교수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전문(全文).

***김대중 선배님 전상서***

저승길을 떠날 때 별로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섯 가지 복중에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첫째는 오래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넉넉한 재물입니다. 셋째는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넷째는 "유호덕"이라 하여, 덕을 즐기고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라 합니다. 다섯 가지의 복의 마지막이 "고종명"이라 하여, 방금 말씀드린 대로 죽음의 자리가 평화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옛 어른들의 가치기준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는 많이 다를지 모르지만, 김대중 선배님은 그 오복을 마음껏 누리신 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인생70이 예부터 드물다"고 하였거늘, 인생 85는 누구나가 장수라고 부러워 할 것입니다. 저도 몇 년 더 살면 선배님과 비슷한 나이가 될 터인데, 아마 누구나 선배님께 장수의 비결을 물을 겁니다.

재산에 관하여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런 말 저런 말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래도 요단강 건너가신 뒤에도 두고 가신 식구들의 먹고사는 일은 걱정 안하셔도 될듯합니다. 마지막 몇 년은 투석도 해야 하는 힘든 날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한쪽 다리가 좀 불편하셨던 것 외에는 몸이 매우 건강하셨고 정신은 더욱 강건하셨으니 하늘이 내리신 크나 큰 축복이었다고 믿습니다. 덕스러운 삶이었기에 한나라의 대통령자리에도 올랐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노벨평화상수상자도 되셨을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전직 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병문안 가서 쾌유를 빌었다는 것도 사람 사는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거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영국 수상, 독일수상이 앞을 다투는 듯 먼저 애도의 뜻을 표하였고, 이웃나라 일본의 국영방송 NHK는 다른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선배님의 서거소식을 국민에게 알렸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군사정권하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의 투쟁을 하던 때에는 불러서 점심 또는 저녁을 사주신 적도 있고 저도 후배로써의 도리를 다하노라고 최선을 다 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되신 뒤에는 매우 소원한 사이가 되어 단 한 번도 청와대에 불러 주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저도 어느 날 조용하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무렴 깊은 인연을 가졌거늘,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태연하게 이 세상을 하직한 선비 성삼문이 우차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사세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시 한수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북소리 덩덩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넘어가는데

황천으로 가는 길엔 여인숙하나 없다고 하니

이 밤을 뉘 집에 묵어 갈 건가

참 멋있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인물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기에 우리들이 자존심을 지키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따져야 할 일도 있습니다마는 오늘은 그런 마음이 되지가 않습니다. 선배님은 통일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싶으셨을 텐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시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선배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리겠다던 그 사람들, 제발 선배님의 이름 석 자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좀 타일러주세요.

제 손에 죽은 덩컨 왕을 바라보면서, 매크베스는 이렇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After life's fitful fever, he sleeps well"

편히 잠드시기를 빌며, 이 붓을 놓으려고 합니다.

2009년 8월 21일

옛날의 동지 김동길 드림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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