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진우]거목의 빈자리, 대화로 채우자

  • 입력 2009년 8월 20일 03시 03분


2009년 대한민국은 ‘상중(喪中)’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 잇달아 우리 곁을 떠났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고 영원한 정신적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한 시대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는 걸까. 광복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숨 가쁘게 달려왔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고 합법적인 선거 외 군사쿠데타 등의 비정상적 방법으로 권력의 이양이 이뤄지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 정치과정이 우리의 정치풍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역갈등 끝내고 힘모을 때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는 대립과 갈등을 수반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지역갈등이 심화됐으며 대북정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이념대결이 격화됐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해집단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히 ‘통치불능’의 시대가 도래한 듯 보이기도 했다. 민주국가의 의회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 활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정치인은 걸핏하면 의회를 버리고 거리로 나선다. 이제 낡은 유산을 버릴 때가 됐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립과 갈등의 한 축에 서 있던 분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차별받는 지역을 위해 싸우던 분들이었다. 이분들의 싸움을 이제 끝내야 한다. 민주주의, 평화, 지역주의 해소는 더는 싸움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성취해야 할 목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며칠 전에 병상을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기나긴 세월을 뒤로하고 마침내 극적인 화해의 모습을 보여줬다.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동지 간의 오랜 분열에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뜻을 달리 하는 정치인을 한자리에 모으고 서로 대화하는 장을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또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감정과 이념 갈등에 치우친 대북정책 논쟁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대화로 전환되기를 기대한다. 김 전 대통령의 ‘퍼주기’는 북한에 핵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줌으로써 한반도 안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햇볕정책 이후 남북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음은 틀림없다. 답답하긴 하지만 북한과의 교류도 많아지고 접촉의 창구도 늘어났다. 변변한 연락 채널도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비해서는 상전벽해의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논쟁의 어느 편에 서 있든 극단적인 독단은 버려야 한다. 햇볕정책의 공과를 잘 평가하고 활용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화해-용서” 당부 기억해야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영남과 호남의 해묵은 지역갈등이 해소되는 계기가 되길 빈다. 고질적인 지역주의는 한국정치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갉아먹는다. 지역주의는 반목하는 세력 간의 불신을 낳고, 불신은 상대방의 존재와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부인으로 연결된다. 지역주의 정서에 근거한 편협하고 불공정한 인사는 유능한 인재의 발굴과 등용을 가로막아 인적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저해한다.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은 분노와 저항을 유발하고 소모적 투쟁만 부추길 뿐이다. 동서화합이 우리 정치의 최대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거인을 떠나보내면서 정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를 남겨놓고 떠나는 한국 현대사의 거목들은 한목소리로 화해와 용서, 상생과 협력을 당부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빈자리를 현명하게 채워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최진우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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