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민주화 동지-정적 ‘애증’-JP DJP 연합… ‘내각제’로 결별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활짝 웃던 ‘3金시대’13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 16일)를 두 달여 앞둔 1987년 10월 13일,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왼쪽부터)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 리셉션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활짝 웃던 ‘3金시대’
13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 16일)를 두 달여 앞둔 1987년 10월 13일,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왼쪽부터)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 리셉션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3金의 인연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2명의 정치인이 있다.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 그리고 한때 공동정권을 이뤘지만 오래 못가 결별한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한 이들 ‘3김(金)’은 한국 정치사에 진한 애증의 드라마를 남겼다.
YS와는 동지와 정적(政敵) 사이를 넘나드는 관계였다. 두 사람은 40여 년의 정치인생 동안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 배를 탔지만 정치적으로는 DJ 부인 이희호 여사의 회고처럼 ‘물과 기름’ 같았다.
우선 스타일부터 달랐다. DJ는 어떤 일이든 철두철미한 논리를 중시했지만 YS는 순발력을 앞세운 ‘감(感)의 정치’를 중시했다.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할 때 직선제개헌 서명 목표를 놓고 벌인 설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DJ가 현실성을 감안해 ‘100만 명’을 제시하자 YS는 “누가 숫자를 세어보겠느냐”며 1000만 명을 주장했다.
DJ와 YS가 직접 대결을 벌인 것은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1970년 신민당 대통령선거후보 경선, 1987년과 1992년 대선 등 네 차례다.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과 1992년 대선에서는 YS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DJ가 각각 승리했다. 1987년 대선 때는 두 사람 모두 패배했다. 특히 1990년 평화민주당이 빠진 ‘3당 합당’은 DJ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거대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YS는 14대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다. 대선 패배 직후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두 사람은 2007년 대선 때도 부딪쳤다. YS는 이명박, DJ는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YS는 과거 민주계 조직을 대거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에 포진토록 했고, DJ는 대선구도를 ‘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 대결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을 비롯한 당시 범여권 세력의 통합을 주문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대통령 임기 중 아들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YS는 차남 현철 씨가 한보특혜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DJ도 아들들이 각종 이권사업과 관련한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YS의 차남 현철 씨의 사면 문제로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1997년 5월 구속 기소된 현철 씨는 1999년 8월에야 사면됐다.
YS는 DJ의 퇴임 이후에도 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구원(舊怨)은 DJ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풀렸다. 10일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YS는 중환자실에 누운 DJ 대신 이희호 여사를 만나 위로하고 돌아가며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압을 받았던 DJ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이었던 JP와 손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DJ는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잇따른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1961년 5월 13일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3일 뒤 터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이 청년장교 JP였다.
DJ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JP와의 연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 100석을 목표로 했던 1996년 총선에서 자신이 만든 국민회의가 79석의 초라한 성적을 낸 직후였다. DJ는 1995년부터 지역등권론을 펴며 영남이 아닌 다른 지역도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지만 JP와의 연대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총선 직후 참모들은 충청권의 맹주인 JP와 연대하지 않으면 대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끊임없이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DJ는 대선 직전 JP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킴으로써 ‘호남+충청’이라는 이른바 ‘DJP연합’을 실현시켰다. DJP연합은 1997년 대선에서 충청표의 상당수를 끌어와 DJ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DJ는 집권 초 JP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자민련 몫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JP와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했다. JP의 후임 총리도 자민련 몫(박태준 이한동 전 총리)이었다. 하지만 DJP연합 합의사항의 핵심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지키지 않았다. JP는 합의를 지키지 않는 DJ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곧 결별을 맞았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시민단체가 자신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자 “DJ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JP는 2004년 4월 17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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