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여기자 재판’ 계기로 양자대화 물꼬 틀듯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6월 9일 02시 54분



보수단체 회원들이 4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의 사진을 앞세우고 이들의 석방과 북한 핵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장면. 8일 북한 중앙재판소는 이들에게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보수단체 회원들이 4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의 사진을 앞세우고 이들의 석방과 북한 핵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장면. 8일 북한 중앙재판소는 이들에게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클린턴 “인도적 문제”… 대북제재 논의와 선긋기

《북한이 억류 중인 미국 여기자 2명에게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함에 따라 이들의 석방을 위한 북-미 간 교섭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여기자 문제를 놓고 이미 북측과 서한을 교환한 것은 본격 협상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각에선 북-미 양측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협의를 진척시켰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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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더 큰 대가’ 원해… 석방까지 시간 걸릴수도


여기자 석방 절차 본격화하나?

1990년대 두 차례 방북해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의 석방을 이끌어냈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3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재판이 끝나면 그때가 바로 협상에 착수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선고를 내린 이제부터가 북-미 양측이 뭔가 활발한 주고받기로 해법을 찾을 시기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여기자 석방교섭 전망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두 여기자를 바라보는 북-미 양국의 시각이 확연히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2차 핵실험으로 추진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 결의안과 미국의 테러지원국 재지정 움직임으로 코너에 몰려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여기자 문제 자체가 아니라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압박을 완화시키고 더 큰 보상을 얻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제재에 대응하는 정치적 협상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뜻대로 따를 가능성이 크지 않아 해법 마련에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다. 미국은 안보 현안과 여기자 문제를 분리해서 접근하고 있다. 클린턴 장관은 7일 ABC방송과의 대담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북한과 관련된 정치적 이슈로 이어지거나 유엔 안보리의 논의와 섞이는 걸 원치 않는다”며 “이는 (외교안보 이슈와) 별개의 문제다. 이건 인도적 문제다”라고 강조했다.

과거 북측이 미국 억류자들을 풀어줄 때마다 요구했던 미국의 사과 여부도 관건이다. ABC방송은 “클린턴 장관이 북측에 사과하고 여기자의 석방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클린턴 장관은 “나는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행동을 취해 왔다”며 서한 발송을 사실상 인정했지만 사과 여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힐러리 장관은 또 ‘희망적 신호가 돌아왔느냐’는 질문에 “일부 긍정적 반응을 받았다”고 말해 북-미 간에 교신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 정부는 자국민의 신변안전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기 때문에 이미 북측과 물밑 대화를 상당히 진행시켰을 것”이라며 “양측의 협의에 따라 재판이 열렸다면 여기자들이 조기에 석방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으로 인해 꼬일 대로 꼬인 북-미 간 대치 국면이지만 양국은 여기자들의 석방 교섭을 통해 한반도 안보위기 국면에서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북한이 더는 추가 도발을 하지 않는다는 게 전제다.

과거 억류사건 해결 사례

북한이 미국인을 억류한 사건은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정치적으로 원만하게 해결됐다.

북한은 1968년 1월 23일 승무원 83명이 탄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원산항 앞 동해상에서 나포했다. 승무원들을 인질로 붙잡은 북한은 미국 측에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해 12월 23일 길버트 우드워드 미 육군 소장은 ‘오직 승무원의 귀환을 위해서’라는 전제 아래 “미국 함선이 북한 영해에 침입해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것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엄숙히 사죄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에 서명했다. 서명 직후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는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왔다.

1994년 12월 강원도 휴전선 상공을 순찰하던 미군 헬기가 피격되면서 조종사 보비 홀 준위가 북한에 억류됐다. 리처드슨 당시 미 하원의원이 방북해 북한과 협상을 벌였고 홀 준위는 13일 만에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다른 조종사 1명은 추락 당시 사망해 시신으로 돌아왔다.

1996년 8월에는 한국계 에번 헌지커 씨가 술에 취해 알몸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다가 간첩 혐의로 구금됐다. 이때도 리처드슨 주지사가 대북특사로 방북해 헌지커 씨를 데려올 수 있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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