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달린 ‘만사兄통’ 일보후퇴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이상득 “당무-정무-정치 현안 관여 않겠다”

“많은 오해에 하루하루 곪아가” 토로

“정계은퇴 요구 선제 방어일뿐” 시각도

“저는 정말 요즘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보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고통의 나날의 연속을 저는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6선의 이상득 의원(경북 포항 남-울릉)은 굳은 표정으로 A4용지 2장에 적어온 문서를 천천히 읽었다. 그는 “요즘 저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첫 번째 이유는 제 개인의 부덕의 소치다”라고 운을 뗐다. 이 의원은 이어 “앞으로 당무와 정무,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엄격히 처신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최고·중진연석회의 참석도 삼가고 지역구 국회의원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 및 한일의원연맹 회장으로 경제와 자원외교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 신상발언을 마무리했다. 이 의원은 발언 후 잠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자들과 악수를 한 뒤 회의장을 나갔다.

○ 밀려났나, 선수 쳤나

이 의원의 이날 ‘선언’은 전날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4월 재·보선 패배 이후 당내에서는 정종복 전 의원의 경주 국회의원 재선거 공천에 이 의원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또 최근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논란에 휘말리면서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떳떳하다”며 버텼다.

그는 최근 당 쇄신논의 과정에서 자신의 퇴진 문제가 공론화되자 일주일 전에 2선 후퇴 쪽으로 가닥을 잡고 발표 내용과 형식을 두고 고민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2일 쇄신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원희룡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 의원의 거취 문제를 건의하겠다는 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의원은 2일 오후 발표문을 직접 작성한 뒤 박희태 대표에게 심경을 알렸다. 이어 3일 아침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정두언 조해진 이춘식 권택기 김영우 의원 등 안국포럼 멤버들을 만나 자신의 결심을 털어놨다. 그는 “내가 하루하루 곪아간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원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대통령 패밀리는 문제가 있다’는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대통령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의원의 결정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선 김대중(DJ) 정부 때 ‘2인자’로 통했던 권노갑 당시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의 2선 퇴진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당시 소장파였던 정동영 의원이 DJ가 주재한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들 눈에 권 의원이 김영삼 정권의 ‘소통령’이었던 김현철 씨처럼 보인다”고 앞에서 대놓고 공격했고 권 위원은 결국 퇴진했다.

일각에선 이 의원의 결정이 자기 방어를 위한 선제적인 조치가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쇄신특위를 비롯한 소장파 의원들이 2선 후퇴가 아닌 정계 은퇴까지 거론할 움직임을 보일 것을 예상해 먼저 한발 물러섰다는 것이다.

○ 여권의 진로는

경위야 어찌됐든 이 의원의 이날 선언으로 쇄신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한나라당은 더 큰 파고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정가에선 이 의원을 사실상 이 대통령의 ‘정치적 대행자’로 여긴다. 이 의원 같은 ‘권력의 핵’이 빠지면서 당내 세력 분포에 진공 상태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한 친이(친이명박)계 의원은 “이 의원의 공백을 이재오 전 의원이 메울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친이계 의원은 “이 의원은 본인이 물러남으로써 친박(친박근혜)계를 당의 전면으로 이끌어내 양 계파 간 화합을 유도하겠다는 포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친박계가 이 의원 퇴장 이후 이재오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부분 국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박근혜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설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새 권력 지형이 형성되기까지는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은 본인의 향후 거취와 관련해 주일대사 등이 거론되고 있는 데 대해 “처음 듣는 얘기”라며 선을 그었다. 당내에선 이 대통령이 이 의원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고 당의 분란이 계속되면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있다. 그는 일본 부품소재산업 유치 등을 위해 이날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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