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자 ‘북핵의 역설’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위기마다 뚜벅뚜벅 순매수 행진… 주춤하는 개미와 차이

“한국경제 펀더멘털에 충실”에 “對北 불감증” 지적도

《요즘 북한의 도발과 위협이 연일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외국인투자자들의 태도는 이례적일 정도로 평온하다.

외국인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강행한 지난달 25일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국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한국의 국가부도위험을 나타내는 지표도 북한 악재와 상관없이 안정되는 추세다. 통상 한 나라의 정치 또는 안보 상황이 불안하게 진행되면 가장 먼저 발을 빼는 것은

외국인투자자들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일부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주춤거릴 뿐 외국인들은 매번 나서서 시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 때문에 증시에서는

‘북핵 패러독스(Paradox)’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외국인투자자들이 국제정치 상황을 꿰뚫어 보고 북한의 도발이 파국적인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견해와 외국인투자자들 역시 10년 이상 지속된 북핵 위기로 대북(對北)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상반된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어떤 북한 악재에도 무덤덤한 외국인

지난달 27일 북한의 ‘군사적 타격’ 위협 소식이 전해지자, 당초 북한 악재에 의연한 반응을 보였던 개인투자자들은 순매도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외국인은 25, 26일에 순매수를 보인 것은 물론 27일 이후에는 오히려 매수 강도를 더 높였다.

외국인은 1998년 금융시장 개방 이후 북한 관련 악재가 있을 때마다 매번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올해 4월 5일 북한이 장거리로켓을 발사하자 다음 날 열린 증시에서 외국인은 2600억 원을 순매수하며 개인의 매도 물량을 받아냈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직후와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때도 외국인은 ‘바이 코리아’ 기조를 유지했다.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는 소폭 매도 우위를 보였지만 대신 주가지수선물 시장에서 4000계약을 순매수하며 향후 증시 상승에 ‘베팅’했다.

이런 현상은 국제 외환 및 파생상품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국고채 5년물에 대한 신용부도위험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올 3월 한때 4.65%포인트까지 치솟았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져 1일 현재 1.52%포인트를 나타냈다. 해외에서 평가하는 한국의 국가 신용도가 그만큼 더 높아졌다는 뜻이다. 원-달러 환율도 지난달 27일 1269.40원까지 올랐지만 곧 하락세로 접어들어 3일에는 연중 최저치인 1233.20원까지 떨어졌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북한 리스크보다는 달러화 초약세 흐름, 신흥시장 주식 매수세 등 글로벌 이슈에 시장이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전했다.

○ 주변 여건은 악화, 경계 늦추지 말아야

북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외국인투자자들이 국내 금융시장 안정에 결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이머징 마켓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정세가 불안한 한국 주식과 원화를 사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도 많다.

전문가들은 외국인들이 글로벌 경기의 회복 여부, 한국 기업들의 실적 등 경제관련 지표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북한 문제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군사 행동보다는 갖가지 도발로 단기적인 이익을 노리는 북한 정권의 속성상 남북관계가 전면전 등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해외 신용평가사들도 “전쟁 리스크보다는 북한의 체제 붕괴로 인한 ‘통일 리스크’가 한국의 등급 산정에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북한의 후계구도에 대한 뉴스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금융연구실장은 “외국인들이 북한에 대해 특별히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지난해 많이 팔았던 한국 주식의 비중을 정상화하려는 과정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긴장 상태가 며칠 가는 건 외국인들로선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북한 관련 악재의 진행 양상에 따라 이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2002년 연평해전이나 2006년의 1차 핵실험 때와 지금은 정치, 경제적으로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 그 근거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예전과 상황이 다른 만큼 문제 해결 기미가 안 보이거나 국지적 교전으로라도 가게 되면 경제주체들의 심리적 위축이 과거보다 더 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