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강경도발은 외부 아닌 내부통제용?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5월 27일 02시 49분



외부제재엔 ‘내성’ 생겨 말 안먹히는 내부 더 문제
北 중간 간부들까지 김정일 정권 불신 확산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좀 더 강한 제재조치를 담은 대북 결의안을 채택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결의안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증시 등 경제가 북한 핵실험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학습효과가 생긴 것처럼 수십 년간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살아온 북한도 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이 두려운 것은 외부의 제재가 아니라 내부의 ‘통제 이완 현상’이다. 북한 체제는 이미 상부의 지시가 현장에서 거의 먹히지 않는 ‘중환자’ 단계다. 북한 당국은 올 4월 시장에서 공업품을 팔지 말라는 지시를 전역에 하달했다. 5월엔 개인이 산기슭에 일군 소토지의 경작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이 지시는 현장에서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지시가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 주민도 거의 없다. 요즘 북한에서 중앙의 지시는 당 간부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간부들은 단속을 한다며 주민에게서 뇌물을 받고 장사와 소토지 경작을 눈감아주고 있다.
최근엔 그동안 충성집단이었던 노동당 중간 간부의 이탈도 가속화하고 있다. 북한에서 경제난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심이 노동당에서 떠난 데 이은 새로운 현상이다. 사람으로 치면 말초신경(민심)이 마비된 뒤 이제는 머리로 향하는 중추신경(중급 간부)까지 마비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일심단결’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지금은 체제가 관성적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 정립’이라는 크나큰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엔 현재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체제 대수술에 상당하는 개혁정책을 펼치든지 아니면 내부 통제 강화를 통한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외부와의 대결 구도를 갈 데까지 펼쳐보는 것이다.
북한에 핵은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 북한은 이 전 재산을 걸고 체제보장과 경제원조 등 대수술에 필요한 것을 모두 얻어내려고 한다. 핵무장 포기 대가로 경수로만 제공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릴 때가 됐다. 경수로를 얻겠다고 북한이 전 재산을 걸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다. 문제는 북한이 바라는 대가가 한국과 미국 일본 등 북한의 비핵화를 주장하는 나라들에 너무나 과중한 부담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북한은 핵 포기 대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면 외부와의 대결 구도를 갈 데까지 가져가려고 할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로 대결 구도의 원인을 제공하면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로 맞서게 된다. 이런 처방은 다시 북한에 내부 독재를 강화할 수 있는 핑계 거리를 제공해준다. 핵이나 미사일의 약발이 떨어지면 북한은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라도 새로운 내부 통제 강화의 빌미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남한은 북한이 긴장 상태를 고조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번 핵실험은 1차 때와는 달리 별다른 예고도 없이 이뤄졌다. 무서운 전조다. 핵개발을 6자회담의 흥정 대상으로 올려 놓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핵탄두만은 갖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경이 마비돼 가는 북한이 이젠 인내심을 잃어버린 듯하다. 이 경우 한반도의 비핵화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성을 잃은 북한이 이판사판으로 나오면서 남한에 주는 위험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남측의 대북 강경정책이 북한의 내부 통제 강화로 이어져 김정일의 독재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해 준다는 점은 한국 정부에 있어 또 다른 딜레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상중인 와중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것은 북한이 이제 대남 변수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번 핵실험 날짜는 이달 중순 북한이 억류 중인 미국 여기자들에 대한 재판을 다음 달 4일에 한다고 공포했을 때 이미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 현충일에 핵실험을 하고 1주일 정도 국제사회의 대응을 지켜본 뒤 여기자 재판을 활용하려고 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장례 기간이 끝나는 29일 이후로 핵실험을 미루면 국제사회의 반발이라는 소음 속에 여기자 재판 카드가 묻혀버린다. 결국 북한은 핵실험이 남측 주민을 격노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변수를 더 중요하게 보아 핵실험 날짜를 선택한 것이다. ‘중환자’ 북한을 다루는 좀 더 신중하고도 현명한 정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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