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총리 각하’라 불러 나도 ‘주석 각하’ 호칭”

  • 입력 2008년 5월 27일 02시 58분


강영훈 전 총리 회고록 출간… 방북 뒷이야기 등 소개

1988∼1990년 국무총리를 지내며 세 차례 남북 고위급회담을 이끌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다양한 인생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펴냈다.

강 전 총리는 26일 출간한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동아일보사·사진)에서 어린 시절부터 6·25전쟁 시기, 국무총리 재임 시절 등의 기억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겪었다”면서 “한국 현대사의 솔직한 증언이자 인생의 작은 지침서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고 밝혔다.

강 전 총리는 ‘내가 보고 만난 세상과 사람들’에 한 장을 할애하며 인상 깊었던 인물들을 추억했다. 특히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뛰어난 기품”과 “커다란 평화”라고 표현하며 극찬했다.

그는 주영 대사 시절 신임장 봉정식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만나 20분간 얘기를 나눴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왕에 대해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의 공비 박찬주 여사가 주는 느낌과 흡사했다”며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있었다”고 평했다. 교황은 “털끝만큼의 위압감이 없이 자상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는 분”으로 기억했다.

1990년 10월 18일 제2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북한 주석과 있었던 ‘각하’ 호칭의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국민감정을 고려해 김 주석에 대한 호칭을 주석 또는 주석님 정도로 하고 각하란 호칭을 안 쓰기로 작심했다. 하지만 대화 도중에 김 주석이 뜻밖에도 내게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주석 각하’라고 호칭했다. 상대가 호탕하게 나오는데 나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옹졸한 처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국무총리를 끝내고 199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았을 당시는 “흔쾌한 마음으로 봉사의 삶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강 전 총리는 “이기주의나 각종 비리를 타개할 수 있는 덕목인 인도, 봉사 원칙을 각오하는 운동이야말로 사회 민주화, 산업화 과정과 함께 가야할 시의 적절한 민주사회운동”이라고 역설했다.

6·25전쟁 당시 한강다리 폭파 책임 공방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에 대해 “한강다리를 건널 때 수행했지만 (한강다리 폭파) 명령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폭파 책임 문제로 사형당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군법회의에서 채 참모총장이 명령했다고 진술한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치했던 기억, 서른두 살에 국방부 차관에 임명돼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만났던 일 등도 담겨 있다.

강 전 총리는 회고록을 마치며 “우리 인류에게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약소민족을 희생물로 삼은 비극적인 시대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면서 “세계화 시대로 진입하는 오늘날 반드시 풀어야 할 과도기적 문제”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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