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산단 르포]“5시간이면 될 일을…5년 동안 뭘 했나”

  • 입력 2008년 1월 2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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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행정 산업자원부와 한국전력, 영암군 관계자들이 19일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산업단지의 전봇대와 가로등을 둘러보고 있다. 블록 운송 차량이 이동할 때 지장을 주는 시설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영암=박영철  기자
뒷북 행정 산업자원부와 한국전력, 영암군 관계자들이 19일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산업단지의 전봇대와 가로등을 둘러보고 있다. 블록 운송 차량이 이동할 때 지장을 주는 시설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영암=박영철 기자
《탁상행정의 상징이 된 전봇대를 옮기는 데 5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기업에서 몇 년간 호소했지만 관계기관이 서로 떠넘기며 차일피일 미루던 민원이었다.

이동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은 20일 “대불국가산업단지 주변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휴스틸 사거리 전주 2개 중 대한세라믹스 쪽에 있는 전주는 오늘 중 즉시 철거하기로 했고 휴스틸 쪽에 있는 전주 1개도 2, 3일 후 다른 곳으로 옮겨질 예정이다”라고 밝혔다.(이 대변인이 언급한 휴스틸 사거리는 미포사거리를 말한다)

이 대변인은 “철거가 시급한 전주 2개 외에 동부중공업 앞에 있는 전주 6개도 4월 중에 예정된 대형 선박 블록이 완성되면 통행에 지장을 줄 수 있어 도로변 안쪽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2개의 전주를 없애고 6개의 전주를 옮기는 데 필요한 비용 5000만 원 중 3200만 원은 한전에서 부담하고 1800만 원은 혜택을 받는 3개 해당 업체가 부담하기로 했다.》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이종승 기자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이종승 기자

▽급히 옮긴 전봇대=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20일 오전 9시경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산단 미포사거리.

한전 영암지점 전력공급팀과 하청업체 직원 10여 명이 도착했다. 굴착기와 기중기 등 중장비가 보였다.

이들은 대한세라믹스 쪽의 전봇대(16m)를 옮기기 위해 10여 분 동안 작업안전회의를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감전의 위험이 높아 가급적 전봇대 이전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

하지만 한전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발언 이후 문제의 전봇대에 관심이 높아지자 작업을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이 전봇대는 1996년 대불산단이 완공될 때 들어섰다.

2006년 산단을 방문했던 이 당선인의 눈에 띄었다가 18일 인수위 회의에서 탁상행정의 사례로 거론됐는데 2003년경부터 업체들이 옮겨 달라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

굴착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보도블록을 파헤치자 직경 36cm 전봇대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들은 주변 업체가 전봇대 이설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지 않도록 무(無)정전 시스템을 가동한 뒤 전봇대에 올라 전선을 끊었다.

이어 기중기로 전봇대를 들어 올려 하천 쪽으로 3m가량 옮기는 작업이 5시간 만에 끝났다.

작업을 지휘한 위창량(50) 한전 영암지사 전력공급팀 과장은 “미포사거리는 대불산단에 있는 전체 40여 개 선박블록업체가 대불항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라 서둘러 공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전봇대가 있던 지점은 8차로에서 6차로로 도로가 갑자기 좁아지는 곳이다.

대형 선박 블록을 실은 트레일러가 교차로 커브를 돌기 위해서는 교통을 전면통제한 뒤 전봇대와 교통표지판을 피해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곡예운전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업체들은 교차로 주변의 전봇대만이라도 서둘러 지하에 묻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전신주를 피해 지그재그로 운전하다 보면 적재 물량을 포함해 100∼300t에 이르는 대형 트레일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전복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관계기관은 난리법석=이 당선인의 ‘전봇대 발언’이 18일 알려진 뒤 관계기관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바쁘게 움직였다.

산업자원부 사무관 3명은 이날 바로 서울을 떠나 영암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불산단을 돌아다니며 업체 관계자들에게서 불만과 개선희망 사항을 듣고 다음 날 열리는 간담회에 참석해 주도록 요청했다.

한전은 본사 차원에서 대책회의를 열고 가능한 한 빨리 전봇대를 이설하기로 결정했다. 실무자들은 작업날짜를 20일로 정한 뒤 하청업체를 찾느라 하루 종일 전화기에 매달렸다.

20일에는 대불산단을 관리하는 한국산업관리공단과 영암군 관계자들이 업체 대표를 다시 찾았다.

공단의 대불지사 직원들은 “원래 전선 지중화(地中化) 작업은 업체가 전부 부담해야 하는데 지자체-공단과 절반씩 부담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산단 내 업체들은 “관계기관이 업체의 어려움을 알아서 진작 나섰더라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블록제조업체인 ㈜유일의 유인숙(45·여) 대표는 “임시방편으로 전봇대 한두 개를 이전하기보다는 모든 차량이 방해물 없이 운행하도록 교차로에서 대불항에 이르는 편도 1km 구간의 전봇대 20여 개와 가로등 40여 개를 모두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9월 이 당선인이 대불산단을 방문했을 때 처음 전봇대 이설 문제를 제기했었다.

영암=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대불산업단지:

전남 영암군 삼호읍 일대에 있는 국가산업단지. 1989년 착공해 1996년 완공됐다. 면적이 1114만 m²에 이르는 대규모 산업단지로 전남 서남권에서 가장 크다.

연간 총생산액은 2006년 기준으로 약 6000억 원. 정부가 지난해 ‘혁신 클러스터’로 지정했다. 2010년까지 세계 1위의 중형 조선산업단지로 만들고 생산액을 2조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300개 내외의 입주 업체 중 170여 개가 조선업체다. 근로자 5500여 명이 조선이나 철강 등 주력 업종에 종사한다.

이 중 선박의 일부인 대형 블록을 제조하는 업체는 40여 곳. 이들 업체는 블록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산단 내 도로변의 전봇대 600여 개와 전선 때문에 물류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진다며 민원을 제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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