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철희]유연한 외교는 왜 힘이 셀까

  • 입력 2008년 1월 17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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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한국 외교는 보혁(保革) 갈등 속에 삐걱거렸다. 양 진영은 냉전기에 낼 수 없었던 잃어버린 ‘우리의 목소리’를 찾아서 제가끔 목청을 높였다. 보혁을 막론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으로 고양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좌파는 한반도에서의 냉전 탈피와 평화 정착을, 우파는 동맹 강화와 국제적 위상 증대를 외쳤다.

좌파적 성향의 노무현식 외교는 바깥세상에는 신경 안 쓰고 우리 목소리만 크게 내려고 했다. 문제는 우리 목소리를 낸 게 아니라, 우리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데 있었다. 우선 이들은 바깥세상을 너무 몰랐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외치며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우리 민족끼리’ 문제를 풀려 했다. 북한문제가 국제 정세 판단의 궁극적 잣대였다. 북한의 눈치는 살피면서도 대북문제에 대해 시각이 다른 미국과 일본 등 우방과 갈등하기 일쑤였다. 둘째, 한국의 힘에 대한 평가가 오락가락했다. ‘자주’나 ‘균형자론’을 외칠 때는 한국을 대국처럼 여겼고, 일본에 대해 ‘외교전쟁’을 벌일 때는 소국적, 소아적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문제의식이 19세기적이었다.

좌파외교, 바깥세상 너무 몰라

셋째, 이들은 한국 외교의 지평을 점점 줄여놓았다. 김영삼 시대의 세계화라는 지평이 김대중 시대에는 동아시아로, 노무현 시대에는 다시 동북아로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남북문제에 함몰됐다. 10여 년간 사실상 축소 지향의 외교를 한 것이다. 넷째, 이들은 현실보다 신화를 쫓아갔다. 동북아 공동체는 언젠가 이루어야 할 이상이지만 아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꿈이었다. 동북아 공동체를 외치며 사실은 동북아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다섯째, 이들은 말할 것은 안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은 말했다. 이라크에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견해놓고 생색 한 번 제대로 못 냈다.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쉬쉬한 게 노무현식 외교다. 가장 친미적인 정책들을 쏟아놓고도 미국에 가면 반미주의 정권으로 몰린 것이 노무현식 외교다. 말로 까먹고 말로 다 잃어버린 외교였다.

그러면, 보수가 정권을 잡았으니 노무현식 외교의 반대편으로만 뛰면 되는가? 냉전형 외교로 돌아가도 우리의 설 자리와 목소리는 없다. 느슨해진 한미일 간의 공조를 높이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한미일만 강조하다 보면 한국은 미일 동맹의 언저리에서 들러리를 설 수도 있다.

중국도 불안해한다. 중국은 우리에게 도전인 동시에 기회다. 미국과 중국 양쪽을 적절히 포섭하면서 한국이 일본과 중간지대에 함께 설 때 한국의 지렛대가 커진다. 북한문제는 남북 공조만으로 풀 수 없다. 6자회담의 모멘텀을 살려 나가고, 국제 공조를 다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북한에 대한 원칙적 포용정책을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의 대북 지렛대는 살려야 한다. 북한과 대화 채널을 재구축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으면서 핵을 포기하도록 끈기 있게 설득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북한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픈 충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깊은 고민을 보여줄 때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먼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버릴 수 없는 꿈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버리고 동맹에 다걸기(올인)하면, 일본이 한때 동맹을 위해 반(反)아시아로 돌아섰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게 된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도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협력을 한국이 적극적으로 주도할 때 우리 목소리가 커진다. 한국이 한미일 삼각연대와 한중일 연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국가-사안별 연합하는 지혜를

한국이 세계의 중상위권 국가라는 자각 아래 글로벌한 문제의 이해 당사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한국에 걸맞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국가군별, 사안별로 연합을 하는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미일 협력을 동아시아에서의 개방적 지역주의와 연결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를 버리고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남의 소리를 되뇌기보다는 우리 목소리를 제대로 내는 외교를 할 때다. 북한의 소리나 미국의 소리가 아니라 글로벌 감각으로 다져진 ‘한국의 소리’를 낼 때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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