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인근 수해흔적 찾아보기 어려워
안내원 “부시 APEC-OPEC 구분도 못해”
“美와 관계 안좋아 경제 어렵다” 시인도
기자들 통제… 숙소밖 한 발짝도 못나가
아리랑 참관땐 “기자선생 박수 인색 실망”
수행원들과 취재기자단을 안내한 안내원들의 말과 표정도 밝았다. 안내원들은 가족관계, 출신대학 등 가정사를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사진을 함께 찍으며, “김정일 지도자 동지만 믿고 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안 좋으니까 솔직히 경제가 어렵다”며 경제난을 시인하기도 했다.
북측 인사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남측 정치 상황이었다. 방북 첫날인 2일 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장에서 북측 관계자들은 남측 참석자들에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냐” “이 후보도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냐”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은 잘되고 있느냐”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미국 방문 중 문국현 씨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데 사실이냐”는 등 대선과 정국 상황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160km의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지나며 황해도 서흥군 서곡휴게소에서 한 차례 쉬었을 때 한 안내원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고향이 여기 서흥입니다. 아십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남측 사정엔 환하다고 한다.
그러나 북측은 기자들에게 안내하는 장소 이외에서의 취재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방북기자단 숙소였던 고려호텔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호텔 직원들과 공식 일정 취재를 위한 이동 때 만나는 안내원들을 제외하고 평범한 평양 시민은 만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벽’에 부닥치는 일도 많아졌다.
정상선언 서명식 때도 청와대와 방북기자단은 현장 취재를 요청했지만 북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2박 3일간 ‘방북기자단’ 자격으로 김 위원장의 육성을 직접 들은 기자는 50명의 공동취재단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다. 북측 관계자는 “위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육성이 공개된 적은 없다”고 우겼다. 공식 환송식에서는 방송 기자들이 버스에서 내리지 못해 현장 리포트가 무산되기도 했다.
기자들이 잠시 버스에서 내리자거나 취재를 요청할 때마다 북측 안내원들은 “기자들이 없는 얘기를 지어낼 줄은 알겠지만…” “찍지 말라는 사진 찍고, 묻지 말라는 것 묻고 하는 걸 보니 기자 맞구먼” “온 김에 사상교육을 좀 받아야겠다”는 등으로 비아냥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에 대한 언급에선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부 안내원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이번 정상회담 합의문은 무효가 될 것” “한나라당이 악을 품고 정상회담을 반대한다” 등의 말을 했고,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는 “일국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APEC와 OPEC도 구분 못해서 발음이 왔다 갔다 하고”라고 조롱했다. 부시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때 APEC를 OPEC로 잘못 말한 것을 꼬집은 것.
체제를 수호하려는 분위기도 강하게 느껴졌다.
“기자 선생들이 공연 중에 박수가 인색했습니다. 이념을 떠나 여러분을 위해 고생한 공연자들을 위해 박수도 제대로 못 치는 그런 배짱을 가지고 어떻게 통일 과업을 해 나갈 수 있갔습니까. 실망도 보통 실망이 아닙네다. 언론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네까.”
한 평양 시민은 아리랑 공연 관람에 대한 남측 내부 논란을 의식한 듯 “배 아픈 사람들이나 싫은 소리를 한다”고 기자들의 속내를 떠보기도 했다. 그는 단원 선발은 영광이며, 커서도 명예가 된다고도 했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이번 정상선언문엔 종전선언 추진과 백두산 직항로 개설 등에 대한 획기적인 내용이 포함됐다. 북으로 가는 길은 가까워졌지만 통일로 가는 길은 쉽게 단축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가슴이 아렸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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