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종빈]공무원은 중립, 대통령은 예외?

  • 입력 2007년 7월 1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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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는 공직 기강 관련 장관회의에서 일선 공무원의 정치권 줄 대기와 문건 유출 등 기강 문란 행위에 강력히 대처하라고 주문했다.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막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지만, 대국민 서비스라는 공직 본연의 책무에 충실하고 사적 정치 활동을 자제하라는 취지이므로 환영할 일이다.

정부의 선거중립 ‘이중잣대’ 논란

“어라! 그러면 대통령은?” 총리의 발언을 접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이다. 왜 정부는 대통령만 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가능하고 일선 공무원은 안 된다고 생각할까? 특정 정당, 특정 후보 집권의 부당성 지적과 특정 정당에 대한 옹호는 정치권 줄 대기가 아니란 말인가? 대통령만 자연인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른 공직자는 자격이 없다는 말은 아무리 대통령의 이중적 지위를 항변해도 설득력이 없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는 그나마 국민의 높은 신뢰를 받는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를 탄압하고 있다. 선관위 압박의 수단으로 헌법소원의 청구, 질의서 제출 및 공개 등 최고 통치권자로서는 너무 가벼운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발언할 내용을 미리 제출해 선거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요구는 초등학생 수준의 주먹다짐을 자극하는 오기와 독선의 비아냥거림이다. 동일한 발언이라도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음에도 사전 검토를 강요하는 일은 네 차례에 걸친 선관위의 대통령 선거 중립 의무 준수 요청에 대한 유치한 보복 행위이고 대통령 권한의 남용이다.

선관위의 권위와 위상은 대통령 개인이 폄훼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선관위는 권위주의에 대항한 국민적 투쟁의 결실이자 오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로서 건강한 법치주의를 지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과거 관권선거의 폐해 극복과 공명선거를 염원하는 사회적 합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소수의 정치권력이 동원정치로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이다. 많은 신생 민주국가가 우리 선관위 시스템을 자국에 이식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통령이 ‘후진적 제도’이고 ‘후진적 해석’을 한다고 폄훼하기에는 이미 ‘선진적 제도’로 뿌리내렸다.

미국의 대통령은 의원 유세에 직접 참여하여 특정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선거자금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우리 대통령이 유사한 선거 활동의 자유를 누리기에는 정치 환경이 매우 다르다. 미국은 관권선거 경험이 없어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반면 우리는 관권·금권 선거운동의 폐해를 경험하여 엄격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정치상황 다른 美와 비교는 잘못

미국에서는 중앙당의 선거 영향력이 미약하고 후보자 개인 중심의 캠페인이 당락을 좌우하기에 대통령의 선거운동이 갖는 파괴력은 우리만큼 크지 않다. 또한 미국은 초기 건국자들이 영국 식민지의 경험으로 대통령 독재를 우려해 권한과 의무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고 모호하게 규정해 정치 활동의 자유를 자연스럽게 보장한다. 반면 우리 대통령에게는 준수해야 할 실정법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상징이다. 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보다는 행정부 최고통치자로서의 책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수 국민의 생각이다. 대통령은 정치적 소신을 맘껏 표출하면서 일선 공무원에게만 중립 의무를 강요하는 이중적 잣대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와 실천이 있어야만 장차관을 포함한 일선 공무원의 정치권 줄 대기를 막을 수 있다. 대통령은 권력기관도 아닌 선관위 힘 빼기와 정치판 뒤흔들기를 중단하고 국가 정책의 마무리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윤종빈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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