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재정 장관의 억지 주장

  • 입력 2007년 6월 15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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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5층 브리핑룸.

브리핑에 나선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옥수수, 콩 등 4만4000t(약 200억 원 상당)을 북한에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그는 지난해 북한의 수해 복구를 위해 제공하다가 핵실험으로 중단된 쌀 지원량의 잔여분 1만500t(약 200억 원 상당)의 지원도 재개하겠다고 말했다.

2004년 이후 3년 만에 재개되는 WFP 지원에 대해 이 장관은 “북한의 어려운 식량 사정, 네 차례에 걸친 WFP의 지원 요청,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쌀 잔여분 1만500t 제공에 대해서는 “인도적 지원의 긴박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WFP의 지원 요청도 지속적으로 이뤄져 온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이후 중단했던 대북 식량 지원을 왜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재개하기로 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정부는 올해 북한이 요구한 쌀 차관 40만 t 지원 문제는 북한의 6자회담 2·13합의 이행과 연계했고, WFP를 통한 지원과 쌀 잔여분 제공도 ‘여러 상황’을 이유로 지원을 미뤄 왔다. ‘여러 상황’이란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이유로 핵시설 폐쇄를 미뤄 온 것을 의미한다.

이 장관은 “쌀 차관과 WFP를 통한 지원은 원칙과 성격이 다르다”고도 주장했다. 형식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부가 해마다 40만∼50만 t씩 제공하는 쌀이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구호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남북은 장관급 회담 합의문에서도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식량을 제공한다’고 명시해 왔다.

이 장관은 지난해 12월 취임 일성으로 “어떤 정치적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른 시일 내에 인도주의적 지원의 개념을 세우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 장관은 취임 6개월이 넘도록 변변한 원칙 하나 세우지 못했다. 이날도 “취임 당시는 남북 관계가 불투명했지만 이후 빠르게 복원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단순한 인도적 지원이나 차관 성격이 아니라 경제 개발과 함께 고려하기 위해 다시 재검토 중이다”라는 군색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번 ‘원칙 없는’ 대북 지원 재개에 대해 쌀 차관 유보에 반발하고 있는 북한을 달래 경색된 남북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40만 t의 쌀을 달라고 큰소리치는 북한이 1만 t의 쌀을 어렵사리 북송하는 이 장관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할 것 같지는 않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 장관의 결정은 남북 관계의 실질적 개선에 기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대북 지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만 약화시킬 것이다.

하태원 기자 정치부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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