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1976년 외교문서 25건 공개

  • 입력 2007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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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가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외교사료관에서 공개한 외교문서들. 이날 공개된 문서는 1976년에 만들어진 것들로 25건 11만9000여 쪽이다. 홍진환  기자
외교통상부가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외교사료관에서 공개한 외교문서들. 이날 공개된 문서는 1976년에 만들어진 것들로 25건 11만9000여 쪽이다. 홍진환 기자
“주한미군 - 전술핵 철수 막아라”

카터 후보에 비밀 보고서 전달

외교통상부는 4일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의 외교문서 25건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미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던 지미 카터 민주당 대선 후보의 주한미군 감축 정책 및 대한(對韓) 인권 문제 제기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력을 집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제고에 힘쓰던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대미 설득 외교=정부는 카터 후보의 당선에 대비해 주한미군을 1980년까지 주둔시키고 전술 핵무기를 계속 한반도에 배치하도록 하는 외교목표를 설정하고 주미 대사관 등에 미국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지시했다.

정부는 1976년 7월 주미 대사관과 중앙정보부를 통해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과 한국 인권 상황에 대한 해명 등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비밀리에 카터 후보 진영에 전달했다.

또 같은 해 8월 김영선 당시 주일 대사에게 일본을 방문 중이던 카터 후보의 참모 존 포프를 만나 함병춘 당시 주미 대사와 카터 후보의 면담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 정치인에 대한 활발한 접촉은 1976년 10월 터진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동선 씨 등이 미국 정치인들을 상대로 금품로비를 벌인 배후에 한국 정부가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한미 간에 심각한 외교마찰이 초래됐으나 미 의회와 법무부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정부는 또 미국 정부가 미 시민의 북한 지역 여행 제한 조치를 해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한 대미 외교를 펼쳤다. 당시 주미 대사관 측은 미 국무부 차관보 등을 만나 북한의 호전적 태도 등을 강조하며 조치 연장을 설득했고, 미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77년 3월 카터 대통령은 미 국민의 북한 여행 제한을 해제하고 유엔 연설을 통해 북한 등 아시아의 모든 적성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남북 외교전=1976년 프랑스 파리에선 북한의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가입 문제를 놓고 남북 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북한이 9월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에 상주대표단 파견을 추진하자 정부는 유네스코 측을 상대로 북한 대표단의 규모와 활동을 제한하도록 요청했다.

또 정부는 같은 해 8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타임지와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세계 유력 언론에 북한의 자주평화통일 정책의 허구성 등을 지적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는 1975년 비동맹회원국이 된 북한이 제5차 비동맹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주장을 펼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실제 이 회담에 참석한 허담 북한 부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이 남한에 1000문의 핵무기를 들여왔다”며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남측의 도발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정부는 회담 참가국 대표들을 일일이 접촉해 북한의 주장을 반박했으나 북한은 일부 대표에게 보석 등을 선물하는 등 선물공세를 펼쳐 자신의 주장이 반영된 회담 결의문 채택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외교문서엔 당시 미국 의회와 언론에서 박정희 정권이 통일교의 배후 지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데 대해 정부가 대책회의를 열고 이를 반박하는 의견을 미국 측에 전달한 내용도 담겨 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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