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력은 한 국가가 가진 국력의 종합적인 발현이다. 그렇다면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로 국제사회에서 ‘실패한 국가’라는 조롱을 받아 온 북한이 세계 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도 강대국들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 관철해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북한외교 왜 강한가=북한의 외교는 ‘원칙’에 충실한 외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표방하는 원칙이 김정일 체제의 유지에 관한 것이어서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지는 못하지만 북한 외교관들이 그런 원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평가할 만하다. ‘약소국일수록 원칙에 충실한 외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의 정석을 나름대로 실천하는 셈이다.
6자회담의 한국 수석대표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20일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 대해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 하여튼 굉장히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한과 협상을 벌였던 미국의 외교관들은 “북한의 주장 자체는 말이 안 되지만 북한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애쓰는 외교관들은 자기 나라에선 애국자들일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또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자랑한다. 현재 북한 외교를 주도하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부상 등은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핵과 미사일 문제를 다뤄 왔다. 박길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표는 1985년 이후 두 번에 걸쳐 모두 17년째 유엔에서 근무하고 있다. 6자회담 차석대표인 이근 외무성 국장은 1993년 미주국 과장이 된 이후 14년째 미국만을 상대하고 있다. 이수영(일명 이철·72) 스위스 주재 대사도 20여 년을 그곳에서만 근무했다.
미국, 한국의 외교관들이 정권 교체와 정기 인사로 자주 바뀌는 현실에서 북한 외교관들의 노련함은 돋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북한은 체제의 특성상 내부 여론이나 국민이 감내해야 할 부담 등을 고려치 않고 목표를 위해 막무가내식 벼랑끝 외교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현성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선거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민주체제의 약점을 역이용한 것”이라며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감이 협상에서 성과를 내는 데 크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외부세계에 대해 내부 갈등이 존재하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내비치지만 사실은 상대방을 압박하려는 ‘팀플레이’라는 분석이다.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현대 북한의 이해’에서 “북한에 강경파와 온건파, 개방파와 보수파가 있으며 이들 간에 의견 대립이 있다는 것은 다분히 가공된 사실”이라며 “실재하지 않는 북한 내부의 갈등을 이용해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하지만 ‘북한이 핵 게임의 최종 승자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전문가는 아직 진실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고 답한다.
현 단계에선 북한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 북한의 국익을 증진시켰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은 핵 카드를 잘게 썰어 그때그때 국제사회의 양보를 얻어 왔지만 1994년 제네바 합의 당시와 비교할 때 현재 북한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전 고위 당국자는 “국제적 신용 하락은 북한이 입게 된 치명적인 상처”라며 “지난해 북한이 세계식량계획(WFP)의 인도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외교안보연구원 전봉근 교수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서 진 전형적인 경우”라고 했다.
실제로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존립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북한이 반드시 유리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외교안보연구원의 김성한 미주연구부장은 “북한이 아직까지 명확하게 핵 폐기 의사를 보인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할 경우 북한이 초기 보상 조치 등을 얻어낸 뒤 합의를 어길 가능성도 상존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북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외교력만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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