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헌법학자들 “개헌, 정치적 의도 개입땐 반드시 역풍”

  • 입력 2007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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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느닷없이 불거진 개헌 논란은 건국 헌법의 골격을 그대로 지켜온 미국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미국에서도 헌법은 27차례나 개정됐고 그 과정에서 논란도 발생했지만 논의 제기 방식과 개정 범위는 한국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9일 워싱턴의 저명한 헌법학자 2명을 만나 미국 사회에서 헌법 개정이 갖는 정치적 의미와 역사를 물었다.》

■ 피터 버니 교수

조지타운대 법대 피터 버니(사진)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헌법 개정은 여성 참정권 부여, 선거 연령 하향 조정처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해 기본권을 확대하는 것이었다”며 “그럼에도 헌법의 근간에는 건국 이후 손을 댄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개헌이 이뤄져 온 과정은 어떠했는가.

“현대에 들어 대부분 개헌 과정은 보텀업(bottom-up·하의상향) 방식이었다. 대중 사이에서 문제가 제기돼 논의되고 의회가 이를 승인하는 과정이었다. 현대에 와서 대통령이 헌법 개정을 제안한 경험은 많지 않다. 대통령은 별로 많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건국 이후 골격을 전혀 손대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선거인단 제도처럼 논란의 소지가 있는 조항들이 있는데….

“미국에서 헌법 한 대목의 개정을 논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큰 규모의 개헌 논의를 불러일으킨 경험은 없다. 연방의회가 승인하고 다시 각 주의회에서 승인을 받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험이 다른 나라에까지 적용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민주화 역사가 짧은 나라의 경우 여러 정치 주체가 손대고 싶어 하는 이슈가 많을 것이다.”

―미국에서 헌법 개정이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컨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조지 W 부시 행정부 안팎에선 동성(同性) 간 결합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선거 쟁점으로 내걸자는 논의가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 누구도 실제 헌법 개정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에게 일종의 정치적 포지션이었다. 실제로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는 진지한 정치적 시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진지하지 않으며 (헌법 문제에) 정치를 개입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성 간 결혼 문제는 국민들의 의견이 저마다 상이하고 뚜렷한, ‘국민을 분열시키는’ 이슈였다.”

버니 교수는 이 대목에서 “헌법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한 정권의 이익을 뛰어넘는 기본적인 가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 헌법 논의가 정치적 성격을 전혀 띠지 않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헌법 개정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에 따라 찬성하고 반대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헌법 자체가 주민들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 아닌가.”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 아이라 루푸 교수

조지워싱턴대 법대의 아이라 루푸(사진) 교수는 “미국에서 헌법은 가급적 고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대다수의 국민이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법의 안정성을 위해서도 헌법은 고치기 어려워야 한다. 헌법은 모든 법의 출발점으로 미국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왔다. 둘째, 헌법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같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를 향한 존경심이 국민들 사이에 강하다. 220년 전에 그들이 쓴 헌법의 권위와 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그들의 구상을 존중한다. 셋째, 시대의 변화를 헌법이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같은 필요는 법원의 유연한 법 해석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다. 미국의 법원은 다른 나라보다 막강한 헌법 해석 권한을 갖는다.”

―공직자 선출과 관련된 헌법 수정도 있었나.

“1913년 이전에 켄터키 주를 비롯한 몇몇 주에서는 상원의원을 주의회가 뽑았다. 당시 상원의원을 모든 주에서 보통선거로 뽑도록 헌법을 고쳤다. 1951년에는 대통령의 집권을 2차례로 제한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다.”

―앞으로 추가로 헌법이 개정된다면 어떤 게 바뀔까.

“미국에서 헌법은 정말로 고치기 어렵다. 2000년 부시-고어 대결 이후에는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를 개정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 밖에도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허용 문제를 비롯해 여러 단체와 개인의 요구가 있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헌법 개정까지는 무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구가 적은 주에도 많은 주와 마찬가지로 2명의 상원의원을 두는 것은 과도한 대표성 부여(over-representation)라는 의견도 있는데….

“헌법 5조에 ‘주마다 동일한 수의 상원의원을 둔다’는 헌법조항은 절대 고칠 수 없다고 돼 있다. 따라서 이 조항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고칠 수 없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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