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5·18 진실 가슴에 묻고 말없이 떠나다

  • 입력 2006년 10월 23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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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증인 중 한 명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1979년 10·26사태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른 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추대로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8개월간 청와대 주인으로 머물렀다.

▽단명 대통령=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될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측근에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으며, 하기 싫어도 버티어도 안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그는 재임 기간 중 12·12와 5·17 ‘쿠데타’를 무기력하게 목격했으며, 1980년 ‘서울의 봄’과 5·18민주화운동을 힘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던 비운(悲運)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현직 대통령인 그가 좀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서울의 봄 때 좀 더 신속하게 민주화조치를 취했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최 전 대통령은 1980년 8월 10일 ‘가시방석’ 같던 8개월간의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면서 “첫째 광주사태 등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진다, 둘째 평화적인 정부 이양의 선례를 남기는 것이 정치발전이다, 셋째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후진에게 길을 열기 위해 이 자리를 물러난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25년이 넘게 그는 사실상 은둔의 삶을 살았다. 1979년과 1980년 격변기의 진실을 밝힐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창하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최 전 대통령의 증언을 요구했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은 1996년 서울지검의 수사진에 의해 강제 구인됐는데도 끝까지 증언을 거부했다.

재판정에서 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훗날 법정에 와서 증언하거나 소명하는 것은 국가 경영상 곤란하다. 전직 대통령의 증언은 국가원수라는 직위의 위엄을 모독하는 행위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전 대통령이 이때라도 역사의 진실을 증언했으면 과거사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소모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많다.

▽탁월한 외교관=대통령으로서는 불행했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최 전 대통령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해 1967년 외무부 장관에 오른 정통 외교관이다. 그의 외교 실력은 1973년 오일쇼크 때 여실히 발휘됐다. 그해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자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파이살 국왕을 만나 “한국에는 종전 수준으로 석유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 공산당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파이살 국왕의 성격을 파악해 대처한 것이 주효했던 것.

박 전 대통령은 귀국한 최 특사의 등을 두드리며 “자네가 일등공신이야”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대통령은 세련된 영어를 구사한 외교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외무장관 시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렸던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서 갑작스러운 연설을 부탁받고는 종이 한 장만 달랑 들고 연설했던 일화도 있다.

최 전 대통령은 2년 전에 작고한 부인 홍기 여사와 함께 평생 소박한, 서민적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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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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